예술의 힘으로 견디기
“4월은 참 슬픈 날이 많네.”
저녁밥을 먹다가 아들이 불쑥 말했다. 2020년 4월은 ‘코로나 19 사태’라는 또 하나의 깊은 자국을 남기며 지나고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아들은 제주에서 수학여행 중이었다. 내 아이가 무사하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느낀 안도감은 금세 생사가 불투명한 수백 명의 아이들 부모들에 대한 죄책감과 참담함으로 이어졌다. 아들이 현관에 들어섰을 때 와락 껴안는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4.16 재단 온라인 기록관에 ‘기억하겠습니다’라고 겨우 한 줄을 남기고, 4시 16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묵념을 하고, 추모 글들을 읽으면서 슬픔의 실체를 가늠해 보려고 애썼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생이 되어 온라인 수업을 하랴 과제를 하랴 바쁘고 활기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고, 연애를 시작하더니 헤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기타를 치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같은 시간을 통과했을 세월호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아이의 빈자리를 견디며 오열하고, 그리워하고, 막말과 씨름하고,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하는 삶이 동시대, 같은 시간대를 흘러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아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 지금 내 앞에서 돼지불고기를 쌈에 싸서 먹고 있는데, 6년이 지나도 열여덟 아이의 앳된 얼굴로 멈춰 있는 사진을 마주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감히 생각하는 것조차 미안해져서 숟가락을 놓고 설거지 통으로 가져갔다.
존 버거는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라는 책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매일매일 늘어나고 있다.”(36쪽)라고 말한다. 설명하기 힘든 일들을 기어코 언어화해 들이밀며 삶의 진상을 마주하게 만드는 이들이 작가가 아닐까.
문학 안에서 우리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상흔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을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자주 접해보았지만 내가 겪지 않은 이상 그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그 아픔을 마땅히 함께 나누고 싶고 그래야만 할 때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건 문학에 의지하는 것이다. 처참하고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일지라도 슬픔과 고통을 통과해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겁먹은 아이처럼 쫓아가다가도 불현듯 맞닥뜨리는 경이로운 순간이 있다. 살아있음 자체에 대한 감사, 인간의 존엄 앞에 드리우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감상에 젖어 흘리는 눈물은 아닐까, 기억은 잠깐일 뿐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 것에 때때로 죄책감을 느낄 무렵 이 구절을 만났다.
지난 휴가 때, 자기가 자란 집에 돌아온 이저벨은 오빠들이 죽은 뒤 집에 내려앉았던 어둠을, 어머니의 삶에 얼룩처럼 온통 번졌던 상실감을 다시 떠올렸다. 오빠들이 죽었을 때 열네 살이던 이저벨은 사전을 찾아보고, 남편을 잃은 아내를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을 잃으면 과부가 된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가 되고. 그렇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경우에는 그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따로 없다. 아들이나 딸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도 계속 아버지나 어머니로 불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저벨은 사랑하는 오빠들이 죽었는데도 자신이 여전히 누이일까 생각했다.
마치 프랑스 전선에서 날아온 포탄 하나가 이저벨의 가족 한가운데서 터져 메울 수도 덮을 수도 없는 구멍 하나를 남긴 것 같았다. 바이얼릿은 하루 종일 아들들 방을 정리하고 액자에 윤을 냈다. 빌은 말을 잃었다.
-M.L.스테드먼 <바다 사이 등대> p171
이후로 나는 상실의 고통 앞에 서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남겨진 이들의 눈물 앞에서 함께 흘리는 눈물이 진실이기를 바랐다. 상실감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심정일지 헤아려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힘든 이야기들을 읽으면 마음은 천근만근이어도 문학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때 위안을 받곤 한다. 무너진 삶의 잔해 속에서 기어코 고개를 내미는 인간다움의 싹, 인간의 야만을 견디게끔 해주는 자연의 신비와 질서 같은.
생성과 소멸의 원리, 우리 역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가 역설적으로 우리를 영원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폐쇄 회로에 갇힌 자각과 열망이 그 한계와 조건들을 뛰어넘으려는 방법으로 예술을 꽃피우고 삶과 죽음, 이별 사이에 기억과 회상, 꿈꾸기 등의 통로를 마련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영원히 살게 한다. 모든 예술과 아름다운 성취는 죽음에의 운명, 그 자각과 인식에서 피어난다.
- 오정희 <내 마음의 무늬> 44
글을 쓰는 동안 자식 낳는 것처럼 써 내려간 문학 작품 속에서 그 이야기는 한낱 지어낸 이야기일 수 없다. 죽음의 문턱에 서 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더 이상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언젠가는 나도 겪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맞닥뜨릴 이별에 대해 생각하면 늘 아득해진다. 솔직히 이제는 얼마나 내 곁에 머물러 계시게 될까 헤아리게 되는 부모님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고여 나는 애써 장 볼 목록을 생각하거나 타고 가는 버스노선표의 정류장을 순서대로 읽어보거나 한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슬픔에 짓눌리는 순간, 세상의 모든 예술이 나를 일으켜 세워 주리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들 거라는 것 또한 그렇다.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에 홀로 마주한 그림 혹은 음악이 나를 어루만져줄 거라고 믿는다. 책을 읽을 수조차 없을 때를 대비해 좋아하는 책의 구절들을 부지런히 녹음해 두고 있다. 마음이 무너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책의 구절들이 내 안에 수액처럼 흘러들 것이다. 고통 한복판에 서 있던 수많은 이저벨들이 들려주는 말들에 기대어 마음 편히 울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술의 힘에 의지해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