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페리보처럼

봄처럼 피어나는 사랑

by 이화정

겨울 이야기를 마치며 약속했다. 봄처럼 사랑하겠다고. 아직은 한겨울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봄을 향한 기다림은 여느 해보다 간절했었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더 춥고 스산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산책] 북클럽 회원에게는 신간을 일찍 만날 기회가 주어지는데 12월에 도착한 이해인 수녀님의 <그 사랑 놓치지 마라>는 한겨울에 도착한 봄의 위로 같았다. 첫 장에 쓰인 시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녀님이 바로 내 마음을 대변하듯 이렇게 쓰셨기 때문이다.


'바로 앞의 내 마음

바로 앞의 그 사람

놓치지 말자

보내지 말자' - 이해인 <그 사랑 놓치지 마라>, 마음산책


고통을 지나온 수녀님이 전해주시는 말이기에 더 와 닿았다. 마침 출판사에서 마련한 북 토크에서 수녀님을 직접 뵐 수 있었다. 책에서 수녀님을 만날 때는 더없이 여리고 소녀 같으셨는데 직접 뵙고 보니 11년 동안 암 투병을 하시며 얻은 별명처럼 영락없이 여장부셨다. 너무 명랑하고 유쾌하신 수녀님 덕분에 북 토크 내내 유쾌하고 뭉클하고 행복했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위기가 사실은 절대로 놓치면 안 될 지금, 바로 눈앞의 사랑을 서로에게 선물할 기회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귀한 시간이었다. 수녀님이 사인하며 격려해주신 말씀에 울컥했지만 따스한 수녀님 손을 부여잡고 환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 '내가 오늘도 기꺼이 안아야 할 행복'은 바로 앞의 모든 것들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 경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학에 의지하여 타인의 자리에 서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위로받은 만큼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애쓰는 건 더불어 함께 사는 삶에 꼭 필요한 자세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방법 또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할 영역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인간이 삶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읽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이제 상상력의 반경이 보다 넓어진 것입니다. 이제 더 다양한 삶의 흐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직업과 사회적 정체성, 인간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삶의 내적 관점에 대해서도 우리의 공감 능력이 성장합니다. 우리는 정신적 정체성의 성공과 실패,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결정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패하면 어떻게 해서 실패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지요.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는 것은 자기 결정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은 오직 여유로운 가능성의 장 안에서 여러 가지로 입장을 바꿔보는 정신적 활동을 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피터 비에리 <자기 결정> p28



<오렌지색 여우 페리보>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제대로 잘 사랑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길 때마다 펼쳐보는 책이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소개하라면 망설임 없이 ‘사랑한다면 페리보처럼’이라고 말하겠다. 사랑에 빠진 페리 보는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러 소원 나무에게 간다. 소원 나무 앞에 선 페리보는 무턱대고 자신의 소원을 빌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앙상해진 소원 나무를 보는 순간 페리보는 가만히 나무를 안아준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페리보는 나무에게 먼저 사랑을 쏟아붓는다. 매일매일 부지런히 나뭇잎을 모아 소원 나무의 가지에 하나하나 잎사귀를 붙여준다. 페리보의 곁에는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꺼이 나눠 주는 친구들이 수두룩하다. 어느덧 기운을 차린 소원 나무에게 자신의 소원을 부탁하고 기다리는 페리보 페리보의 사랑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보다 나는 페리보의 행위에 감탄하고 감동했다.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구체적인 말과 행위는 나에게 그런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림책의 한 구절이나 소설 속에서 만난 인물의 행동을 보고 깨닫기도 한다.

페리보의 기다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며 풀밭에 누워있는 모습, 그 자리를 떠난 페리보의 모습 사이에 페리보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말이 남아 여운을 남긴다.


그동안 나는 혼자서 햇빛과 바람을 실컷 쐬고, 내 몸에 짓눌린 풀들에게 일일이 사과한 다음, 가슴께에 꽃 한 송이를 꽂아 두었어. 혹시라도 네가 오면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말이야. “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목울대가 뜨거워지곤 한다. 짓눌린 풀들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페리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페리보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기 위해 노력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반전이기도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난 사랑이 이루어지고 말고에 상관없이 페리보가 충분히 행복에 겨웠을 거라 믿는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법이니까 말이다. 페리보가 사랑받는 걸 갈구하기 이전에 충분히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정겹고 훈훈하다. 잎사귀를 나눠준 친구들에게 일일이 감사 편지를 쓴 페리보는 양과 다람쥐. 돼지, 코끼리들에게 그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마음을 전한다. 포옹이 필요한 부엉이는 ‘두 팔 벌려 안아’ 주고, 노래를 원하는 양에게는 ‘즐거운 노래를 불러’ 주고, 키스가 필요한 코알라에게는 ‘뽀뽀하고 또 뽀뽀’한다. 돼지와는 밤새도록 파티를, 손을 잡아주길 원하는 고슴도치에게는 “마지막까지 네 손을 놓지 않을게”라고 페리보를 친구들이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순정한 마음. 조건 없이 아껴주는 마음, 소중하게 담아두는 마음을 페리보에게서 배운다. 숲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기뻐하는 페리보의 세심한 시선을 따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페리보의 편지를 읽으며 고마움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손길과 보듬어 안는 자세를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 정보를 들여다보다가 뒤늦게 원제를 보게 되었다. ‘Love of the Feribot’ 그래, 페리보하면 사랑. 사랑한다면 페리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