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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Nov 07. 2023

[한국문학] 그해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엔 그들이 있었다

김영하, 《검은 꽃》

unplash.com

역사책에는 작은 글씨로 남은 이야기로부터


대학시절 전공과목으로 <표상문화론>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5년도 넘은 기억이라 어떤 것을 배웠는지, 표상은 무엇이고 문화는 무엇이라고 논했는지는 기억은 잘 안 난다. 다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한 후배와 함께 준비했던 발표만은 기억에 남는다.

발표의 목표는 '역사적 사건을 문화콘텐츠가 어떻게 표상하는가.'였고 우리가 선택한 건 '5.18'이었다.
<꽃잎>, <박하사탕>, <26년>, <화려한 휴가>를 연달아 보던 그때의 나는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대한 작은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그날, 그곳에는, '그 사람들이'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에는 000이 있었다.
000칸에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은 몇몇을 제외하면 역사책에 실리지 않는다.
다만 N명의 희생자, N명의 시민군과 같은 분류에 묶이거나 생략되어 보이지 않게 된다.

영화로 시작해 한강의 <소년이 온다>로, 다시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표를 채워가면서 나는 '작은 글씨로 남은 이야기' 속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그저 사회탐구 근현대사 과목의 한 문제였던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생생하게 내 안에 들어오던 순간이었다.

나는 문화콘텐츠, 그 중에서도 소설의 가치는 '타인에 대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 일 만으로도 독자들은 자신과는 살아온 세계가 다른 사람들, 나는 겪어볼 일이 없었거나 앞으로도 만나지 않을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상상하고 생각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무조건 내가 옳고 저들은 틀리다는 아집도, 나와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타인과는 전혀 상관 없기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도, 자신의 프레임으로만 역사와 세상을 보면서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미래를 강행하는 막무가내도 결국은 '상상의 부재'에서 온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역사책엔 작은 글씨로 적힌 혹은 쓰이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분명히 그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다.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잘라버리거나 고치는 게 아니라,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존재를 상상하는데서 공동체는 시작된다.

국가는 그저 비슷한 지역에 사는 인구의 합도 아니고, 통치자의 지배-피지배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인 단어다. 그 중심에는 개개인들,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같은 사안도 다르게 생각하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존재와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것,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사람'을 염두하고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 소개할 김영하의 <검은 꽃>은 구한말 저마다의 이유로 살기 위해 멕시코 이민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교과서에선 '애니깽'과 '숭무학교' 같은 키워드로만 남은 1910년대의 이야기를 작가는 철저한 자료조사에 상상력을 더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5년만 열심히 일해서 돌아가려 했던 대한제국이 사라져버렸을 때,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소설 <검은 꽃>을 읽어본다.

*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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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은 콘텐츠 《검은 꽃》


《검은 꽃》은 90년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소설가이자, 요즘은 알쓸신잡 아저씨로 방송 출연을 많이 하는 지식인 김영하가 2003년 발표한 장편 소설이다.《검은 꽃》은 하와이의 사진 신부와 더불어 구한말 민족수난사의 대표 사건으로 언급되는 멕시코의 '애니깽'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 이민사 연구자의 잡담, '제물포를 떠나 지구 반대편의 마야 유적지, 밀림에서 증발해버린 일군의 사람들'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우리를 1905년으로 보내 광폭한 속도(?)로 역사의 소용돌이로 몰고가는 몰입감을 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개정판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판본으로 도서관에 있을 테니 꼭 읽어보면 좋겠다.

* 개인적인 감상이며,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소설의 일부만 선택해서 글을 씁니다.





unsplash.com

1905년, 일포드호에 오른 1033명의 조선인


이야기는 1905년의 제물포항에서 출발한다. 그곳에는 신분과 직업의 귀천을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보부상이 부리던 고아 장쇠는 그가 잠든 사이에 달아나 헤메다가 선교사가 운영하는 한 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황성신문의 광고 하나를 본다.

멕시코는 어떤 땅입니까? 종로의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였다. 검은 수염이 목울대를 가린 미국인 선교사가 말했다. 멕시코는 멀다. 아주 멀다.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럼 어디에서 가깝습니까? 선교사는 웃는다. 미국 바로 아래다. 그리고 아주 덥다. 그런데 멕시코에 대해서 왜 묻지? 소년은 황성신문의 광고를 보여주었다.
(...)
주린 배의 모양을 닮은 나라가 있었다. 멕시코였다. 선교사는 물었다. 정말 가고 싶으냐? 학교에 다닌 지 석 달밖에 안 됐는데, 더 배우고 가는 게 어떠냐?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답니다. 저처럼 부모가 없는 소년들을 환영한다고 들었습니다.
《검은 꽃》 中


신부의 만류에도 결심을 굳힌 장쇠는 제물포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멕시코로 가려는 퇴역군인 조장윤을 만난다. 그는 '사람은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아명밖에 없던 장쇠에게 김이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대한제국 신식 군대의 공병 하사였던 조장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복을 벗었다. 일본의 군비 삭감과 병력 감축 요구와 그들을 유지할 만한 힘이 없던 대한제국의 상황이 맞물리며 병영을 떠날 수 밖엔 없었다. 1905년 2월 황성신문에 난 대륙식민회사의 광고는 갈 곳 없는 제대병들에겐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비단 제대병들 뿐만이 아니었다. 일터와 돈과 따뜻한 밥이 기다리는 새로운 공간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염원이었다. 그렇게 멕시코 행은 구한말 대한제국을 살던 사람들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고아는 물론이고 거리의 부랑자, 퇴역 군인, 박수 무당, 파계 신부, 양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5년간 바다 건너 나라에서 돈을 벌고 조국으로 돌아오겠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기회를 선택한다.

지금처럼 하루이틀이면 비행기를 타고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땐 수십 일을 먹고 자며 태평양을 건너는 배말고는 갈 방법이 없었다. 조선인 이주민만 1033명, 요리사와 선원들까지 싣고 떠난 일포드호는 하나의 사회와 같았다. 희로애락과 생사의 길이 그들 앞에 펼쳐있었다.

황족의 핏줄을 가진 이종도는 처와 딸, 아들과 함께 배에 탔다. 일본의 승리가 임박했고, 대한제국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운명임을 그는 직감했다. 일본으로 끌려가 생을 마치기보다는 서양의 문물을 배우고 힘을 길러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묵서가, 아주 먼 나라 멕시코 행을 택한다. 명분까지는 괜찮아보였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포드호에 오르자마자 이종도는 언제나 그랬듯이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았고, 선장인 존 마이어스와 중인 출신의 통역 권용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사대부 신분에 걸맞는 선실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출신도 모르는 농민인지 부랑자인지 모를 이들과 함께 갈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 요구는 단칼에 거부당한다. 선원들도 좁디좁은 이층침대를 쓰고 있는 판에 1천여 명의 조선인들에게 모두 선실을 배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싫다면 하선하라는 말에 이종도는 굴욕을 참고 선실로 내려가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배 안에서는 좀도둑 최선길도, 파계신부 박광수도, 농민이나 무당, 내시까지도 양반 사대부와 다를 바 없는 승선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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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켄 농장의 노예 생활


물 위의 생활은 그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전염병인 이질이 돌면서 사망자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몇 사람의 이탈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멕시코 땅을 밟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기회의 땅에 첫 걸음을 내딛은 그들은 상상도 못하게 더운 날씨를 마주한다.


메리다 외곽의 천막촌에서 조선인들은 농장 배정을 기다렸다. 인력 시장 혹은 노예 시장에서 사람을 데려가듯 농장주들이 그곳으로 찾아와 사람들을 뽑아갔다. 외교관이 주재하지 않아 간섭의 여지도 없고, 스페인어를 몰라 도주의 우려도 없는 조선인들을 그들은 후한 몸값을 치르고 데려갔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생전 처음보는 식물이 가득한 밭을 보고 어리둥절하고 만다.

에네킨은 멕시코가 원산지다. 사람 키와 비슷한 크기다. 나무처럼 단단한 짧은 줄기에 잎이 달린다.
(...) 마치 선인장처럼 잎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무수히 나 있다. 잎이 용의 혀를 닮았다 하여 용설란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난은 아니다.
《검은 꽃》 中


바로 선박용 로프의 원료로 쓰이는 에네킨을 수확하는 농장, 원주민인 마야인들을 농노화한 아시엔다로 조선인들은 대륙식민회사에 속아 노예로 팔려온 것이다. 숙소로 쓰는 파하에 배정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마체테를 손에 쥔 그들이 가시로 뒤덮인 에네켄 사이에 들어가 감독관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일을 할 거라곤 말이다.

에네켄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와중에 채찍은 날아오고, 최선을 다해 일해도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금의환향은 커녕 계약 기간인 4년 동안 실컷 부려지기만 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끔찍한 미래가 그려졌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 어린아이도 밭에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편 새 노동자에 돈을 쓰느라 현금이 궁해진 농장주들은 치사한 수를 쓴다. 약속한 급료를 덜 주고, 직영 식료품 매점의 물건 값을 올리는 방식으로 그들을 궁지로 몬다.


그러나 조선인 무리에는 퇴역군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일 통솔력이 있었다. 한 손에는 에네켄 수확에 쓰는 마체테를, 마체테가 없는 이들은 돌을 들고 본격 파업을 일으킨다. 총을 차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채찍을 휘두르던 감독관들도 칼을 든 성난 노동자를 막을 수 없었다. 농장주와의 대면 협상으로 옥수수와 토르티야를 무상배급하되 나태하거나 탈출하는 자는 처벌을 받는 선에서 합의점을 찾는다.

원주민인 마야인, 이주 노동자인 조선인, 농장주와 감독관의 멕시코인 세 민족이 공존하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 생활은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마야인 여성을 겁탈했고, 그 남자가 목이 잘린 채 발견되는 한편, 복수의 복수를 위해 마야인을 죽인 조선인 둘이 살인이 발각되어 매질을 당해 죽기도 한다. 도망을 가다 감독관에게 죽는 이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그렇게 불안한 균형을 이어가던 와중에 부에나비스타 농장에서 일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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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


병자가 발생한 한 집의 간곡한 요청으로 박수무당은 그를 위한 굿을 벌인다. 돼지머리에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꾸린 간소한 상을 차리고 신나게 춤을 추는데 농장주와 감독관이 들이닥친다. 그들이 보기에 무당은 '사탄'과 다름없었다. 박수무당을 잡아가 공개적으로 매질을 하자 사람들은 힘을 합쳐 폭동을 일으키나 경찰의 진압봉과 총탄에 진압당하고 만다.

다른 농장에서는 노동조건이 나빠지고 처우가 가혹해져갔다. 하루는 어부 최춘택이 탈출을 하다가 매질을 당하자 군출신들이 다시 모여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총격전으로 번진 사건은 농장주가 말라리아로 급사하면서 계약 기간내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자유를 보장한다는 협상으로 마무리 된다.

애니깽 혹은 어저귀라고 불리는 에네켄 농장의 조선인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저 살고 싶어서 멕시코로 왔고, 살고 싶어서 일했고, 살고 싶어서 싸웠다. 투쟁 끝에 하나 둘 돈을 모아 자유를 얻는 이들이 생겨갔지만 대다수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들이 떠나 4-5년간 목숨을 걸며 멕시코 생활을 버텨내는 사이, 1910년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과 함께 패망했기 때문이다.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으로 걸어들어갔다.
《검은 꽃》 中


돌아갈 나라가 없는 민족, 태평양 건너 낯선 나라에서 떠나지도 뿌리내리지도 못하는 디아스포라. 멕시코 이주의 역사는 민족수난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는 이야기를 역사의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멕시코의 혁명 분위기와 엮어 애니깽 생활을 하던 인물 하나 하나를 조명하며 민족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각자 어떤 삶을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갔을까. 어느날 갑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검은 꽃》의 2부와 3부에서 작가는 독자를 전혀 예상치도 못한 불꽃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중요치 않고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함께 달려가게 한다. 배를 타고 농장생활을 하는 1부도 재밌지만 점차 빨라져가는 템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400여 페이지가 다 지나가있을 게다.

+a)
세상에서 소외되고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원하는 일
그들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상상으로 덧대는 일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나 아닌 다른 이들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
소설을 쓰고 읽는 일 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기본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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