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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Nov 14. 2023

[인문]이것을 읽는 동안에도 나는 수없이 폰을 보았다

《도둑맞은 집중력》,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unsplash.com

아이폰의 스크린타임을 보다가 든 자괴감


내 집중력에 대한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건, 황당하게도 주식 때문이었다. 그리 많은 돈을 넣어둔 것은 아니었지만 몇달 전 벌어진 'SG발 주가폭락' 사건 이후로 주식 어플을 괜히 들락거리는 횟수가 늘었다. 매일 점심즈음 까페로 나와 소설을 쓰다가도, 인풋을 위해 책을 읽을 때에도, 밥을 먹다가도,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주식 어플을 쳐다보았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어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있던 주식을 손해를 보더라도 다 팔아버리자 어플에 들어가는 시간도 자연히 줄더라. 그러나 휴대폰을 보는 시간 자체가 줄지는 않았다. 주식 어플을 보던 시간은 마디게 오르는 조회수를 확인하고자 브런치와 밀리의서재 어플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문득 내가 휴대폰을 너무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크린타임 어플을 보게 되었다. 스크린타임은 말그대로 휴대폰을 얼마나 사용하였나, 어떤 어플을 몇 분이나 사용하였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앱인데, 결과치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최근 일주일 기준,
하루 평균 휴대폰 이용시간은 6시간 35분.
하루 평균 휴대폰을 켜는 횟수는 120회였다.


내가 이렇게 핸드폰을 붙잡고 산다고?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을 켜서 뭐라도 확인한다고?
이 통계는 내가 수면시간 8시간을 제한 16시간 중에 40%는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는 의미였고,
8분에 한 번은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켠다는 의미였다.
꼭 그렇게 확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건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왜 나는 10분도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생각하면서 나는 여느 때처럼 다시, 책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예약을 걸어놓고 한 달을 기다려서 두 권의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예약자가 많았던건 그만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알라딘

같이 볼 콘텐츠, 《도둑맞은 집중력》,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도둑맞은 집중력》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가 쓴 '집중력'에 관한 책이다. 만연한 멀티태스킹, SNS에 끊임없이 접속해 연결되는 환경, 부족한 수면시간과 질 나쁜 식품들, 환경에 의해 늘고 있는 어린이들의 ADHD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며 '우리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이 글에는 담지 않았지만 '잔혹한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 파트가 인상적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은 일본의 칼럼리스트 이나다 도요시가 분석한 Z세대의 콘텐츠 시청습관에 대한 책이다. 왜 요즘 사람들은 콘텐츠를 건너 뛰기를 하면서 소비하는지, 인터뷰와 통계를 통해 젊은 세대가 그러한 콘텐츠 시청습관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캐치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임팩트를 준 부분만 추려서 쓰고, 제맘대로 내용을 편집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내 집중력이 망가진지는 꽤 되었다. 일본 여행을 가는 2시간 짜리 비행기에서 챙겨온 소설을 읽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 2시간을 넘는 러닝타임이 디폴트가 된 영화를 보는 일도 부담이 되어 영화관을 덜 찾게 되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이런 방향으로 진화한 것일까. 생각이 많아진채로 책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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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터넷에서 가장 찾고자 한 건, '나의 의미'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요한 하리는 자신의 대자 애덤과의 여행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릴 때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꽂혀 멋지게 노래부르는 데 집중하던 애덤은 어느 순간부터 네모난 세계에 갇혀버렸다. 하루종일 스마트폰과 아이패드만 보는 평범한, 아니 답답한 아이가 되었다. 저자는 대자와 함께 그레이스랜드로, 멤피스로, 뉴올리언스로 떠나 여행하는 즐거움, 스마트폰 밖에 진짜 세계를 보는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단, 밤을 빼면 휴대폰을 꺼두는 약속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뜻대로 여행이 풀리지는 않았다. 애덤은 여행 중에 여러번 약속을 어겼고, 전화를 안 쓰겠다고 했지 문자나 스냅챗을 안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며 항변했다. 저자는 애닲음을 느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도 눈 앞에 실물이 있는데도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에 머리를 처박고 감상(?)하는 풍경이 너무 만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순 없어!" 내가 말했다. "넌 현재에 머무는 법을 몰라! 네 삶을 놓치고 있다고! 넌 네가 뭘 놓칠까 봐 무서운 거야. 그래서 내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게 반드시 뭔가를 놓치는 방법이야! 너는 단 하나뿐인 네 삶을 놓치고 있어! 바로 네 눈 앞에 있는 것, 어렸을 때부터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것을 못 보고 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사람들 좀 봐!

《도둑맞은 집중력》 中


집중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애덤과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마주한 건, 탈출구가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후에 저자가 프로빈스타운으로 3개월간 여행을 떠난 건 잃어버린 집중력을 찾기 위해서, 관심과 연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긴급전화만 가능한 구형 핸드폰과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 노트북, 그리고 몇권의 종이책과 함께 '연결없는 여행'을 떠났다.

저널리스트로서 매일 정보를 인풋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아웃풋을 만들어내야 했던 그는 처음에는 몹시 불안했다. 요가를 배울 때에도,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있을 때에도 읽지 않은 메일함이나 한시간 마다 확인하던 뉴스함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곳 생활이 점차 익숙해지면서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 더불어 자신이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평온은 그에게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2주째 되는 날 저자에게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그는 습관처럼 잠에서 깨자마자 아이폰을 잡으러 탁자로 손을 뻗었고, 긴급전화 외에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는 깡통 휴대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무슨 감각인지 파악할 수 없는 강렬한 감각이 마음 속에 인다. 해변을 거닐며 사진을 찍거나 휴대폰 화면을 보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당신들은 삶을 낭비하고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 핸드폰 내놔! 내 거야!'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핸드폰이 없음에 당혹감을 느꼈고, 독서를 할 때도 '그래서 요점은?'하고 물으며 정보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생각은 돌아갔다. 프로빈스타운의 생활과 요가는 그의 몸의 속도는 늦출 수 있었지만, 정신의 속도는 늦출 수 없던 것이다. 그는 우연히 까페에 앉아 소개팅을 하는 듯한 두 사람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인터넷에서 가장 그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처음 만난 듯한 두 남자는 한 쪽이 10분간 자기 얘기를 하고, 다음에는 다른 쪽이 10분간 자기 얘기를 하는 방식으로 번갈아 가며 서로의 말을 끊으며 자기 얘기를 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페이스북 정보 업데이트를 번갈아 가며 읽어주는 것 같았다고.

저자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 집중하고, 다른 정보는 수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며, 주의가 부패하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아에만 집중되는 나르시시즘이 된다고 한다. 그가 그리워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다. 'SNS의 팔로워 수', 세상 사람들이 '널 보고 있어. 네 얘기를 듣고 있어. 우리는 네가 필요해.' 하고 말하는 신호들로 부터 단절되자 그는 '넌 중요하지 않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상을 살고 있지만 의미는 잃어버린 것 말이다.

책의 내용이 남일 같지 않았다. 글을 업로드한 후에는 브런치든 인스타든 밀리로드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접속하여 하트나 좋아요, 댓글, 조회수를 체크했다. 그것들의 수치가 잘 나오면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반응이 거의 없을 때는 공연히 마음이 쓸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의미를 내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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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멀티태스킹, 그리고 창의성에 대하여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사회와 시스템을 연구한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몰입'연구의 최고권위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를 찾아간 에피소드다.

미하이 교수가 심리학을 배우고자 미국에 왔을 때는, B. F. 스키너의 연구가 미국 심리학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이론을 요지는 '인간의 행동은 설계자가 선택한 방식대로 유도될 수 있다.'였는데 미하이가 보기엔 이 관점이 '인간 심리를 바라보는 암울하고 제한적인 관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인간으로 사는 의미가 공허한 기계적 반응 이상의 것을 낳는다고 생각했고, 예술 활동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화가들의 작업 과정을 관찰하던 중, 그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것은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이지 결과물과 작품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암벽을 등반하는 과정, 시를 쓰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이나 유토피아를 기대하며 행하는 게 아니라, 흐름 안에 머물기 위해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무아지경의 상태에 '몰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하고 있는 일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모든 자아 감각을 잃은 상태, 시간이 사라진 듯한 상태,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을 탄 상태, 우리가 아는 것 중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몰입의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가? 바로 명확한 목표를 한 가지만,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주제로, 자신의 레벨보다 조금 높은 난이도에 도전할 때 온다고 미하이 교수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사나 학교생활에서 수없이 마주하는 '멀티태스킹'의 효율은 몰입을 방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경과학자 얼 밀러 교수도 멀티태스킹 과정에서 업무 사이를 오가면 '뇌는 뒤로 돌아가 일이 어디서 끝났는지를 파악하고 짚어내야 하기에' 깊이 사고하는 데 시간을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실수를 바로잡고 뒤로 돌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쓰기 때문이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며 오갈 때마다 '전환'이 일어나고, 우리는 전환을 할 때마다 집중력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던 것이다. 얼교수는 저자에게 "새로운 생각과 혁신은 어디서 나오죠?"라는 질문을 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새로운 생각과 혁신은 뇌가 보고 듣고 배운 것에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 때 나온다.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의 정신은 자동으로 그때까지 흡수한 모든 정보를 돌아볼 것이고, 그 정보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련성을 끌어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일어나지만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각이 튀어나오고, 관련이 없다고 믿었던 생각들이 갑자기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새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도둑맞은 집중력》 中


이 말은 스티븐 잡스의 명연설로 유명한 '커넥팅 닷'과도 연결된다.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일들이 관련성을 맺고 연결되며 관계를 맺을 때 창의성은 발현된다. 우리가 집중력이 떨어지며 동시에 창의성도 잃어버리는 까닭은 빨라지는 '정신의 속도'와 '정보량'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나 공부 중에 멀티태스킹을 해야하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정보를 제한된 시간에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쳐내야할 업무량, 공부량이 쌓여있기에 에너지를 소진해가며 여러 가지에 에너지를 분산해야하고, 단 하나에만 집중할 때보다 덜한 효율로 '해야만 하는 것'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요구를 개인이 거스르긴 힘들다. 정말로 매 순간 순간을 단 하나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다.

 따라서 개인이 '집중력'을 컨트롤 하지 못했다며 자아비판을 하면서 교정하려는 잔혹한 낙관주의보다는, 사회를 구성하는 판에 대해 세상의 뒤에서 특정 행동으로 유도하는 설계자들에 대해 그리고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과 시스템에 대해 직시해야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집중력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가 있으며, 이 책을 통해 그 방법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기존의 책들과는 달리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다. 그러한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게 해서는 문제의 한 단면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 조직적 문제에는 조직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분명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더욱 뿌리 깊은 요인을 위해 집단으로서도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해결책, 실제로 우리가 집중력을 회복할 수 있는 해결책이 존재한다. 그 해결책은 우리에게 문제를 철저히 재구성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도둑맞은 집중력》 中


이 글은 책의 일부를 인용했을 뿐이기에, 그가 심리학, 신경과학 연구소부터 실리콘밸리, 아동심리연구, 식품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연구한 "우리는 왜 집중력을 잃어버리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가 찾은 답은 책을 읽으며 직접 찾아보기를 권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행동을 줄이지는 못했다. 여전히 '의미를 찾기 위해' 앱을 실행했고, 끊임없이 '전환'하면서 멀티태스킹을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뉴스나 카톡을 들락거리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자처럼 인터넷이 안 되는 여행지로 훌쩍 떠나면 해결될까? 아마 고립된 기간은 바뀔지어도 디지털 디톡스가 끝나고 돌아오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해보였다. 내가 연결을 갈구하고, 새로운 정보를 인풋하기 위해 다시 수도 없이 폰을 잡을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도둑맞은 집중력》 을 읽으며 어느새 내 질문은 자연히 '나는 왜 정보 습득과 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에 천착하는가'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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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정보를 습득하는 이유는 결국 불안 때문이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의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일본의 Z세대들이 빨리 감기와 같은 방식으로 영상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기성세대나 (구)미디어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시청습관을 재단하지 않는다. 대신 그러한 행동이 나오기까지 어떤 맥락이 있는지를 주목한다.

빨리 감기는 가성비 있는 시청, 즉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는데 목적이 있다. 세상에 봐야할 콘텐츠는 너무나 많고, SNS나 현실에서 공감을 하기 위해서 아예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내 경우만해도 회사를 다닐 때, 몇몇 드라마를 앞으로 넘겨가며 보던 기억이 있다. 내 취향의 콘텐츠가 마이너 장르였기에, 그것을 스몰토크 거리로 꺼내기 면구스러운 상황이 많았다. 자연히 점심시간이나 커피타임에 말을 끼려면 그 주에 가장 핫했던 콘텐츠, 이를테면 '드라마'나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것을 보아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꼭 그 이야기에 끼지 않았어도 상관은 없었을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팀이라는 무리 내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 이제 저마다의 관심사가 파편화되면서 보통은 없다지만, 속한 그룹의 '보편'은 따라가야할 때 안도감을 느끼는 건 여전했다. 이는 내가 '2022년 베스트셀러를 분석한 글'의 '안전공간' 키워드와도 연결된다.

세상이 급변하고, 저성장과 경제침체로 인해 '안전한 공간'을 찾을 수 없는 세대가 '환상속의 공간'이라는 '안전공간'을 찾고 그 서사에 몰입하듯이 젊은 세대에게 '안전'은 중요한 키워드다. 때문에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행위는 '안전'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된다. 그렇게 공감을 위해 행하는 정보 습득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개성'찾기다.

저자는 오타쿠의 덕질 양상이 '무언가를 깊이 알고 싶은 마음'보다는 '안식처가 될 무언가를 필요로'하는 방향으로 달라진 점을 짚고, 자신만의 취향이나 개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젊은이들은 '좋아하는 것이나 빠져들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덧붙인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가 '인터넷에 접속해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하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SNS에서든, 일상에서든 그 사람의 의미를 드러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위에서 말하는 '개성'이라는 단어와 맞닿는다. 연결 속에서 '나의 의미'를 플레이리스트나 페이보릿 영화 리스트, 구독목록 등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히 이러한 취향과 개성을 중심으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 터고, 그들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일 테다. 서로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되, SNS에 전시되는 모든 콘텐츠의 방향은 '나'로 향한다. 다시 앞선 책에서 언급한 '나르시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경향성의 강화는 알고리즘의 편향으로 이어진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싫어하는 것은 차단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강화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타인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남은 건 타인들 사이에 자리잡은 나의 위치를 확인 하는 일 뿐이다.

내 입장에서 다시 정리를 해보았다.
'정보 습득'은 연결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어나고, 그 위치에서 나는 의미를 찾으며, 그것들의 기저에는 '안전함'을 찾고 싶은 불안감이 깔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의미와 위치를 분주하게 확인을 하며 살았고, 무엇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자주 들여보는 행동으로 불안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잦은 전환으로 발생하는 효율과 창의성의 로스를 감수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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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경험하게 된 몰입의 순간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꽤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그런데 불안, 그저 불안 때문이라니! 대학 레포트에 글을 쓸 때 어떠한 주제라도 쓸 수 있는 '개인들의 연대와 유의미한 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엔딩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내가 본의 아니게 제대로 된 길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몰입의 순간을 거쳐왔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정리하며, 정보와 내 경험을 연결해 결론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었다. 결과물이 어떠하든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자체에만 집중'했던 미하이 교수가 관찰한 화가들처럼, 나는 글을 쓰는 동안은 온전하게 '그래서 답이 뭐지?'하는 생각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글을 쓴지 3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휴대폰을 만지거나 새로운 정보를 만지지 않았으니, 잃어버렸던 집중력을 일부는 찾은 셈(?)이었다.

애석하게도 몇시간 몰입을 했다고 내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회에서 분리되길 바라지 않고, 남들에게서 의미를 찾는 삿된 노력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누구나 몇 시간은 집중할 수 있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미하이 교수의 설명처럼 '흐름'에 올라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모든 자아 감각을 잊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에 느낀 '흐름'에 계속 있고 싶은 상태는 지나갔지만, 빠른 시일에 다시 만나고 싶다. 이왕이면 소설 쓰기에서 '흐름'을 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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