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잇는 여자들 <엄청난 가치> 19강_글쓰기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살까?"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며 던진 질문이다. 엄청 많을 거라고 넘겨짚으며 속으로 '2만 5천 번쯤?'이라고 중얼거렸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6시간 동안 약 6,240가지의 생각을 한다. 내가 너무 많을 거라 생각했나 싶다가, 한의원에 갈 때마다 선생님이 나더라 무슨 생각이 그리 많냐고 타박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대략 2만 번쯤 생각을 하나 보다. 아이고, 숫자만 보고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글쓰기 다섯 번째 시간. 매 시간 열 가지 질문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을 글로 적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보통은 키워드를 간결하게 적는 것으로 시작해 문장, 문단으로 점점 분량이 늘어난다는데 내 교재를 훑어보니 처음에는 서너 줄 적었다가 그다음은 간략한 한 줄, 다음은 두세 단어로 줄어들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꺼내는 데 뭔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까? 그래서인지 글쓰기 시간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의 과거 기억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것은 다른 수강생들도 느끼는 어려움이었다. 서로 느낌을 공유하며 나만 이상한 건 아니라고 안도하기도 했다. 선생님도 이런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이번 시간에는 조금 달리 수업을 진행했다. 일명 '선택과 집중' 전략. 열 가지 질문에 전부 답을 적되 어려운 문제는 넘어가는 평소 방식이 아니라, 질문 중 마음에 드는 몇 개만 골라 그것을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기로 했다. 나에게 주도권이 주어져서일까. 이 방법으로 질문에 접근하니 부담이 훨씬 덜했다. 내가 선택한 질문은 아래와 같다.
-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놀이는 무엇이었나요?
- 초등학교 때 인간관계는 어땠나요? 기억나는 친구들이나 사건들을 떠올려 보세요.
-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선생님의 누구인가요?
- 진학이나 입시를 준비하면서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 희망은 이루어졌나요?
- 학교나 동아리, 교외 단체활동에서의 체험은 나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요?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거나 속 깊은 얘기를 해야 하는 무거운 질문이 아닌 것들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쉽게 풀렸다.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은 주어진 칸이 모자랄 정도로 하고 싶은 얘기가 넘쳐났다. 이전에는 간략하게 적고 나니 시간이 남아서 딴생각을 했다면, 이번에는 시간이 모자라 고른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적지 못했다. 대신 쉬운 질문에 먼저 답을 하고 나니 당시 기억들이 건드려져서인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을 때 기억을 되살리는 허들이 훨씬 낮아진 기분이 들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조금씩 천천히 답해봐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마지막에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좌우명'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두고 팀별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엇, 좌우명이라는 단어에서 내 생각은 또 멈춰 버렸다. 나의 부모님은 방임형에 가까워서 어떤 가치를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교육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대신 각자 떠오른 단어를 적으면 그에 이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가면서, 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쪽지로 대화하듯 그렇게 놀았다.
6천 번 넘는 하루의 생각, 그중 대부분은 잡생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잡생각도 필요하다. 잡생각은 잡생각대로 중요한 생각은 그것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나의 의지로 생각을 붙들고 몰입하거나 생각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날 수업에서도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불편한 감정과 내 생각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