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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Nov 14. 2019

아이의 모든 '처음'

생후 128일째, 아이가 첫 뒤집기에 성공했다

아침 수유를 마치고 기저귀를 갈다가 아이의 옷이 젖어버렸다. 젖은 옷을 벗기고 잠깐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은 후 새 옷을 챙겨 아이 방향으로 몸을 돌린 순간. 깜짝이야.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아이의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는 나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린 것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엄마, 나 뒤집었어요.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이의 두 팔꿈치는 상체를 위태로이 지탱하고 있었다.

생후 128일, 아이가 인생 첫 뒤집기에 성공했다.


4개월에 접어들고서부터 아이가 뒤집기에 성공했는지 묻는 질문을 더러 받았다. 친정엄마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손주를 둔 친구분으로부터 뒤집기 소식을 들었는지 조바심을 내시며 연습을 시키라고 다그치셨다. 우리 아이와 같은 날 태어난 아들을 둔 조리원 동기도 아이의 뒤집기 성공 여부를 자주 물었다.

'때가 되면 할 것'이라고 쿨한 척 대답했지만 그들 덕분에 의도치 않게 4개월 아이의 중요한 발달과제를 알아버린 나도 내심 아이가 언제쯤 몸을 뒤집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예상도 못했던 평범한 어느 날 오전에 아이가 뒤집기에 성공한 것이다. 천장만 바라보던 아이가 어느새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피는 법을 배우더니 이제는 엎드려서 전방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스스로 몸을 뒤집은 아이가 대견하고 감격스러워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동안 아이는 꼿꼿이 고개를 들고 한참을 버텼다.

영광스러운 아이의 첫 뒤집기 순간을 나만 보고 말 수야 없지. 얼떨떨해하던 나는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기저귀만 달랑 차고 상하의는 모두 실종된 채 땀에 젖은 머리를 들고서 엎드린 아이의 모습은 사진 여러 장에 담겨 가족들에게로 전송되었다.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악. 이제 제자리로 돌려놔주세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아이의 표정이 나를 굉장히 호들갑스럽다고 여기는 것 같다. 제 힘으로 뒤집기에 성공한 아이에게 이미 뒤집기는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렸을 수도. 하지만 조금 전 엄마를 방방 뛰게 만든 포인트는 '뒤집기'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것이 네 인생의 '첫' 뒤집기였다는 사실이야,라고 변명하듯 읊조린다.


인생의 모든 '처음'은 특별하다. 어설프고 부족해도 '첫' 경험이라는 이유로 기억에 남는다.

첫 키스, 첫사랑, 첫 경험, 첫눈...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첫 담임선생님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나는 인생의 '처음'에 상당히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의 꽤 많은 '처음'들이 내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 않다. 오늘 내가 아이에게서 보았던 첫 뒤집기, 첫걸음, 처음 내뱉은 말, 처음 쓴 글, 처음 그린 그림, 그리고 나의 첫 기억도.

아이가 기억할리 없는 첫 뒤집기가 내게 특별한 이벤트로 기억될 예정이듯 내 기억에 없는 수많은 처음들도 내 엄마의 기억 속에는 어쩌면 있을 테지.



뒤집기에 성공한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뒤집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상 의식으로 뒤집고, 낮잠을 자다가도 뒤집고, 기저귀를 가는 동안에도 상체는 반쯤 돌아가 있다. 처음에는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던 나도 제자리로 돌려주는 일이 자꾸 반복되자 이제는 그만 좀 뒤집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아이가 뒤집기 시작하면 엄마의 영혼이 탈탈 털린다는 친구의 말이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아이는 스스로 앉고, 기고, 서고, 걷고, 엄마를 부르는 첫 경험들을 할 테지. 그뿐일까. 몇 년 후면 처음으로 학교에 가고, 첫 친구를 사귀고, 그다음에는 첫 외박이라는 것도 꿈꿀 테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기도 하겠지.

언제부턴가 인생에 '처음'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애써 특별함을 찾아야 했던 내게, 아이의 '처음'들이 다시 특별한 하루하루를 선물해준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맞이하자. 너와 나의 '처음'들. 그 특별한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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