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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Dec 24. 2019

짠순이의 70만 원 충동구매 사건

아이의 웃음 한번,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이를 키우면 한 달에 얼마가 든다더라, 성인이 되기까지 몇 억이 든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다를거야' 마음 먹었다. 루이*통 가방 하나씩은 기본으로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 앞에도 에코백을 들고 당당히 나설 수 있었던 내게는 육아의 일반적인 수준까지도 재정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임신 기간, 성장앨범 계약을 권유하는 연락을 수차례 받았지만 귓등으로 넘겼다. 색지로 손수 만든 도구를 활용해 만삭 사진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찍었다. 전문가의 손을 거친 사진에는 못 미쳤지만 가성비를 고려하면 나름 괜찮은 결과라며 만족했다. 50일, 100일 사진도 이렇게 찍어야지 다짐했다.


그런 마음으로 입소한 조리원에서 무료 사진 서비스를 접했다. 아이도 나도 팅팅 부은 얼굴에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현실이었지만 우리 둘의 사진을 전문 사진작가의 카메라로, 게다가 무료로 찍을 수 있는 기회라 기꺼이 참여했다. 알고 보니 어느 사진관에서 성장앨범 홍보차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2~3분 만에 촬영을 마치고 10분 이상 성장앨범 홍보를 들었다.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담당자는 웃으며, 그래도 스튜디오에 한번 방문해서 50일 무료 촬영 서비스도 받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50일 촬영도 무료라고요?"

"네. 조리원이랑 연계되어 있어서 드리는 서비스예요."

조금 전 촬영한 사진은 50일 무료 촬영 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훤히 보이는 영업전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력에 50일 촬영일자를 표시해두었다.


50일 무료촬영 예정일은 실제로는 생후 60일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다. 오전에 예방접종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외출할 생각에 신이 났다. 이전까지 한 달에 한 번 예방접종차 찾는 병원이 유일한 외출지였으며 그마저도 접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다녀와 식사만 간단히 하고 바로 스튜디오에 들렀다 벼르던 전자제품 구경도 하겠다는 계획으로 남편과 나는 한껏 들떠있었다.


그런데 예방접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이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 거의 울지 않던 아이인데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는 거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의 관심을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었다. 목청껏 질러댄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마르고 갈라졌다.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체온계를 몇 차례나 이마에 갖다 대어도 열은 없었다. 아이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가슴에 안았다가, 어깨에 걸쳤다가, 젖을 물려도 보고, 재우려고도 해봤지만 어떤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우는 아이와 씨름하는 사이 어느덧 스튜디오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고 마음속에서는 오늘의 계획들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남편이 나서서 외출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아이의 50일 촬영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남편은 집에 머무는 것이 아이를 진정시키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미리 꾸려둔 가방을 들고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런 일은 처음인 나도 어찌할 도리 없이 남편을 따랐다.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카시트에 내려놓자 곧 잠이 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제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내 마음도 날씨만큼이나 시무룩해졌다.


스튜디오는 아이사진 촬영에 특화된 곳이었다. 만삭의 임산부를 포함해 아이와 동행한 부모들로 실내는 북적였다. 직원은 명단을 확인하고 촬영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잠에서 깬 아이는 직원에게 넘겨졌다. 능숙한 직원이 아이를 눕히고 우리가 골라둔 옷을 입혔다. 그때부터였다. 아이가 방긋방긋 웃기 시작한 건. 아이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직원의 어깨너머 얼빠진 표정으로 제 얼굴을 쳐다보는 내게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이렇게 좋은 날에."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기자기한 스튜디오 곳곳에서 아이는 무려 9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잠깐 칭얼대는 순간도 있었지만 집에서 울어대던 것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정도였다. 직원 두 분이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재롱을 부리자 아이는 제법 잘 반응하며 웃었다. 아이를 달래지 못해 스스로 울다 지쳐 잠들게 만들었던 나는 숙련된 기술자들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촬영이 끝나고 아이 옷을 갈아입히는 사이 사진은 컴퓨터로 옮겨졌다. 커다란 모니터에 아이의 모습이 띄워졌다. 아이는 조명을 받아 평소보다 더 화사한 얼굴로 카메라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한 아이의 얼굴, 그저 평소 같은 모습이 마냥 반갑고 고마웠다.

90여 장의 사진이 차례로 띄워지고 마지막에는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동영상의 끝에는 하늘색 배경지 위에 누운 아이의 꼬물꼬물 움직임이 담겨있었다. 순간 내 마음속에서도 뭔가 꼬물꼬물 움직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빠는 어떡하고 싶어?"

"나야, 당연히 하고 싶지."

생략된 목적어는 '성장앨범'. 남편은 전부터 성장앨범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스튜디오에 와서도 남편의 눈은 성장앨범 샘플을 유심히 훑고 있었다. 아이에게 쓰는 비용마저도 아끼는 내 태도를 남편이 내심 못마땅해한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해주고 싶다는 이유로 나는 꿋꿋하게 육아 관련 지출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성장앨범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 우리도 하자, 성장앨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카드를 꺼냈다. 백일사진, 돌사진, 가족사진까지 포함한 구성으로 총 70만 원. 남편의 눈이 동그래졌다. 2만 원짜리 로션 하나도 가격비교에 배송비 옵션까지 꼼꼼하게 체크하는 내가 앉은자리에서 큰 고민 없이 70만 원을 결제했으니 놀랄 수밖에.


그날 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분명 계획된 소비는 아니었다. 직원들의 화려한 말솜씨와 영업전략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그날 직원들이 하는 말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말하자면 지갑보다 마음이 먼저 열렸다고 해야 할까. 오전 내내 울어서 붉은 기가 남은 채로 카메라와 눈 맞추며 방긋 웃는 아이를 보는 순간, 스르르 마음이 열렸다. 아이의 웃음 한번 얻은 것으로 충분한, 아깝지 않은 70만 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던 내게 보여준 아이의 웃음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사진 속 어린 내가 입은 고가 브랜드의 옷과 신발이 늘 의아했다. 나보다 더 짠순이인 엄마가 부족한 살림에 어떤 결심으로 그런 옷을 사 입혔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 엄마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수없이 있었나 보다. 값을 따지기 전에 스르르 지갑을 열게 되던 순간들. 그 대가로 엄마는 주말 식단을 바꾸고 갖고 싶던 구두 한 켤레를 포기했겠지만, 결코 그 순간을 후회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헤아려본다. 엄마의 마음들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색 바랜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먼 훗날 성장앨범을 한 장씩 넘겨보며 "엄마,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하고 묻는 아이에게 그날의 일을 풀어놓는 상상을 해본다. 추억이 되어있을 지금을 더듬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70만 원짜리 지출의 대가는 아이의 웃음 한 번으로 충분했으니 다가올 행복은 덤.

100일 촬영도 기대된다. 아이는 또 얼마나 밝게 웃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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