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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Nov 12. 2019

7개월 만에 극장에 갔다

엄마의 눈으로 본 '82년생 김지영'

오랜만에 극장에 갔다. 출산을 2주 앞두고 본 영화가 마지막이었으니 7개월 만이다. 극장이 딸린 건물 수유실에서 영화 시작 20분 전 마지막 수유를 하고 아이를 남편 차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매표소에 가서 결제를 하고 자리를 고르고 표를 받는 절차를 밟는데 왜 그리 설레고 흥분되던지. 마치 난생처음 극장이라는 곳을 찾았던 중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 본 영화 제목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엽기적인 그녀'.

아직 영화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눈가가 촉촉해졌다. 만 원짜리 영화티켓 하나 손에 쥔 걸로 세상 다 얻은 듯한 행복을 느끼는 나 스스로가 짠해서.



영화는 82년생 김지영. 책으로 먼저 읽은 작품이다. 책을 읽을 때는 아직 엄마가 되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직장과 일상생활에서의 성차별, 성희롱 피해 경험을 묘사한 부분들이 꽤 공감되었다. 김지영처럼 나도 엄마가 된 지금, 얼마나 더 그녀를 공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정신없이 집안일에 파묻혀 지내는 김지영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한숨 돌리려고 주저앉은 그녀에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번쩍 정신을 차리며 성급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 나는 벌써 김지영이 되고 말았다. 출산 전에 하던 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입을 받고서라도 밖으로 나가 사회활동을 해보고 싶어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옛 동료의 푸념을 들으며 내심 그것마저도 부럽다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정말이지 내 이야기 같았다. 회사를 떠나 있은지 겨우 7개월 지났을 뿐인데.


누군가는 이 영화를 두고 너무 극단적인 입장에서 묘사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무책임한 남편과 비상식적인 시댁 때문에 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여자들도 있다. 주변만 보아도 직장생활을 핑계 삼아 육아는 나 몰라라 하는 남편들이 더러 있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들은 깨어있는 시간 내내 누군가의 손을 필요로 하는 아이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서 살아간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면 그제야 집안 살림을 챙기고 끼니를 때운다.

그에 비하면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은 꽤 사려 깊다. 아이 목욕을 위해 서둘러 귀가하고 명절에도 아내를 배려하려 애쓴다.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남편들보다 모범적인 남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범적인 남편일지라도 오래전부터 멍들기 시작한 김지영의 삶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아내를 위해 육아휴직을 마음 먹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영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열었더니 남편에게서 문자가 와있다. 잠시 내려둔 나의 본분이 떠올라 덜컥 겁이 났다. 아이가 나를 찾아 세상 떠나가라 울기라도 했으면 어쩌지 싶어서. 그런데 문자 내용을 보고는 웃음이 난다.
'영화 잘 보고 있겠네. 똥도 싸고 7시 30분에는 이유식도 뚝딱했어. 8시 반쯤 씻길 거야!'
고백하기 쑥스럽지만 내 남편도 꽤 훌륭한 남편이다. 매일 아침 청소기를 돌리고 퇴근 후에는 목욕도 전담한다. 내년 7월부터는 배턴을 이어받아 남편이 육아휴직을 시작한다. 육아는 온전히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는 반면, 공동의 책임인 육아가 여성에게 집중되는 분위기나 상황에 대해 미안해하며 역할분담을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남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기의 여성은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 7개월 만에 손에 쥔 영화표에 감격했던 이유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꽤 쌀쌀한 날씨였고 눈앞으로 빈 택시가 여럿 지나갔지만 어쩐지 버스를 타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고르지 못했던 선택지를 고르고 싶었다. 시선을 무심히 창밖으로 던지며 이동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내게는 단팥빵을 좋아하는 남동생은 없지만 어쩐지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걸 먹고 싶어 졌다. 남편의 입맛과 아이의 건강을 위한 메뉴가 아니라 철저히 나를 위한 메뉴를. 고심한 끝에 김치전에 맥주나 한 캔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얼마 안 남은 묵은 김치를 반죽해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바싹하게 만들어먹어야지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오니 남편이 아이에게 이유식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 똥기저귀도 갈아주었다는 좀 전에 메시지로도 보냈던 말을 되풀이했다. 평일 저녁마다 귀가하는 남편 옆에서 하루가 얼마나 길고 고단했는지 알아달라고 종알대던 내 모습을 남편이 흉내 내는 것 같아 조금 웃었다.
남편이 묻는다. "나도 영화 보러 갈까?"

시간은 9시 20분. 다음 영화 시작시간은 9시 35분.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얼른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남편이 먼저 얘기하지 않아도 내일쯤 나가서 꼭 보고 오라고 내가 먼저 얘기하고 싶었다.


남편이 나가기가 무섭게 아이는 잠에서 깼고 저를 두고 혼자 영화를 보고 온 엄마를 탓하기라도 하듯 한참 울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는 설렘과 흥분은 까맣게 잊고 아이를 재우느라 지친 나는 다시 김지영이 되어 식탁에 멍하니 앉았다. 앞에는 김치전 대신 30분 전에 해동한 떡 한 봉지가 놓여있다. 조금 전 떡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다가 아이를 깨웠던 기억이 떠올라 봉지를 들추기도 겁이 난다.

몇 점을 집어먹고 있자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해? 나 영화 끝났어."

아이는 잠들었고 나는 떡을 먹고 있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남편이 곧바로 전화를 끊지 않고 단어를 고르는듯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말한다.

"나 곧 가니까 우리 이야기하자. 나 영화 보고 느낀 게 있어."

아들로, 남동생으로, 남편으로,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는 그에게 82년생 김지영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었을까. 뒤늦게라도 김치전을 구워야 하나 고민되는 순간이다.


김지영의 대사 중에 '가끔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었다. 나도 가끔 주문을 걸듯 내가 행복하다고 되뇐다. 아이의 웃는 얼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상상, 아이와의 스킨십이 주는 따뜻함을 행복의 증거로 삼으며.

육아는 시간과 노동과 희생을 필요로 하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나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내 아이는 불행의 이유가 아닌 행복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의 조건은 결코 혼자 힘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멍들어온 김지영의 마음이 안타까운 이유다.
만 7개월이 된 2019년생 정지안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쉬운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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