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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Mar 05. 2020

시작은 '똥'이었다

시작은 똥이었다. 출산 후를 상상하던 임신 기간, 아이의 똥을 처리하는 문제가 무엇보다 큰 걱정이었다.

"난 내 똥도 만져본 적 없단 말이야. 으으..."
"걱정 마. 똥기저귀는 내가 갈게!"

남편의 말에 마음을 놓았고, 대신 소변기저귀는 하루에 몇 번이 되더라도 내가 맡겠다고 큰 소리 쳤다.

지나고 보니 남편의 말은 참으로 무책임했고, 나의 안도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남편이 집에 있을 때만 아이가 똥을 쌀 거라는 전제는 어디서 나온 건지, 원!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똥을 쌌다. 처음에는 샛노란 빛깔을 띤 똥이었다. 그걸 두고 사람들은 '황금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끔 초록색 빛을 띠기도 했다. 색깔이 곧 건강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아이의 똥은 관찰대상이 되었다. 기저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똥에 내성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똥은 똥이었다. 엄마들 눈에는 자식 똥도 예뻐 보인다는 말을 나는 엄마가 되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저귀를 가는 중에 어쩌다 손에 묻기라도 하면 아직도 움찔한다. 최근에는 먹는 음식이 다양해지면서 냄새도 고약해졌다.

그러니까 시작은 똥이었다. 엄마가 되려면 나를 내려놓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의 첫 관문은.

똥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꽤 깔끔한 성격이었다. 잠옷은 매일 갈아입었고 외출복도 상의는 매일, 하의도 꽤 자주 세탁했다. 침대에는 발이 깨끗한 상태일 때만 올라갔다. 이불은 머리 쪽과 발 쪽을 철저히 구분해 사용했다.

샤워는 하루에 한 번 이상 했고, 머리도 매일 감았다. 샤워시간은 30분씩 걸렸다. 바디워시가 몸에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헹구어냈기 때문이다. 머리를 말리고 옷 입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시간을 넘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내 샤워 순서는 언제나 꼴찌였다.


출산 후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샤워 패턴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이는 샤워기 아래서 멍 때리고 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하루 두 번씩도 하던 샤워를 이틀에 한 번으로 줄였다. 30분씩 걸리던 샤워시간은 10분 내외로 줄였다. 머리는 샴푸로만, 얼굴은 물로만, 바쁜 날에는 바디워시 대신 헹굼이 빠른 비누로만 씻는다.

그마저도 남편이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날은 건너뛴다. 몸은 늘어난 샤워 주기에 금방 적응해 큰 불편을 못 느낀다. 하루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불쾌한 냄새를 느끼던 때를 떠올리면 의아하다. 출산 후 여러 신체기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후각에도 문제가 생겨버린 걸까.


샤워시간을 줄이려고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샤워는 무슨. 똥이라도 제때 싸면 다행이지."

다시 똥. 아이 똥을 치우느라 바쁜 엄마들은 정작 자신의 배변활동에는 소홀해진다. 출산 후 방광염에 걸렸다는 말을 했더니 친구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이쪽은 변비를, 저쪽은 치질을 앓고 있단다.

변기에 앉아 포털의 기사 제목을 훑으며 쉬는 시간을 만끽하던 날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10분이든 20분이든 인내하며 기다려주시던 내 직장상사들은 참 너그러운 분들이셨다. 지금 내 상사는 3분을 채 못 기다린다. 문을 탕탕 두드리고 악을 쓰며 울어댄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문을 열어놓고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아이는 이 편이 공평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끙.. 쟤보다 먼저 나와주렴. 부디...!!!'


신생아 시절, 아이는 내 어깨에 미끌미끌한 침을 흥건하게 묻히곤 했었다. 이제는 이유식을 잔뜩 묻힌 얼굴로 가슴팍에 안긴다. 입에 들어갔다가 형체모를 찌꺼기를 건져 나온 손가락으로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가장 의외인 건 나 자신이다. 속으로는 '아... 이거 방금 갈아입은 옷인데' 생각하면서도 아이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다. 토사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아이가 당황할까 봐 얼굴은 웃고 있다.


아이가 남긴 이유식을 주저 없이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의외인 내 모습 중 하나다. 예전에는 내가 남긴 밥도 다시 먹기 싫어했다. 내가 남긴 양념 묻은 밥을 거리낌 없이 드시던 엄마는 참 비위가 좋으시다고 생각했었다. 돌이켜보니 엄마는 비위가 좋았던 게 아니다. 그녀도 원래는 그녀 자신이 남긴 밥조차 못 먹던 사람인지 모른다.

고백하자면... 아이가 바닥에 흘린 이유식을 내 입에 넣은 적도 있다. 바닥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는 아이를 보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어차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에는 나도 저렇게 주워 먹고 자랐을 텐데 뭘.

어쩌면 이전의 내가 필요 이상으로 깔끔 떨며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도 별 문제없는 걸 보면.


나 애엄마예요, 티 내고 싶지 않다던 나는, 이제 영락없는 애엄마의 몰골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먼지나 세균에 대해서는 부쩍 신경을 쓰지만 정작 내 모습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다. 늘어진 셔츠에는 아이와의 시간들이 덕지덕지 얼룩 되어 남아있다.

아이 똥 치우는 문제 따위는 먼저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는 똥을 쌀 것이었고, 나는 결국 치우게 될 것이었다. '엄마'라는 배역으로 무대 위에 선 이상, 좋고 싫은 걸 따질 겨를은 없다.


다행인 건, 얼룩진 셔츠를 입고 있어도 세상 가장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주는 아이가 옆에 있다는 것.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아이의 기억 속 엄마가 지저분한 모습이기보다는 예쁘고 건강한 모습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아이가 기저귀를 뗄 무렵이면 나도 바닥에 떨어진 음식 따위를 주워 먹는 이 생활을 졸업할 수 있겠지? 이제 겨우 11개월이 된 아이의 똥냄새는 그때까지 얼마나 더 고약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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