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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05. 2020

빈집을 다섯 번째 돌아보는 기분

남편과 아이 없이 보낸 모처럼의 자유시간

"자기, 이번 추석에 우리 먼저 부모님 댁에 가 있어도 돼?"

"'우리'가 누구야?"

"나랑 지안이. 자기는 출근해야 하잖아."
입꼬리가 슬며시 당겨 올라가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아쉽지만 그렇게 해."


남편은 명절 전 주말부터, 그러니까 사흘 전부터 아이와 함께 시댁에 가 있기로 했다. 덕분에 내게는 3박 4일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퇴근 후의 저녁시간을 오롯이 내 몫으로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아, 얼마만의 자유인가.

밀린 책도 읽고, 놓친 영화도 봐야지.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 오랜만에 반신욕도 할까? 이왕 하는 거 음악도 틀어두고 기분 제대로 내야지. 맥주도 한잔 거들어야겠다. 이왕 한잔 할 거면 누구 만나서 같이 해도 좋겠지?

캬, 상상은 나를 미혼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Day 1

일요일 저녁, 남편과 아이를 시댁에 두고 혼자 들어온 집안은 엉망진창. 시간에 쫓겨 난리법석을 떨며 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자유시간을 본격적으로 누리려면 일단 집 정리부터 해야겠지? 아이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정리하고, 저녁으로 비빔면 하나 먹었을 뿐인데, 뭐야? 벌써 8시잖아? 드라마 할 시간이네.

드라마를 보는데 놀고 있는 손이 허전해서 괜히 손톱깎이를 가져왔다. 손톱을 깎고는 스마트폰을 열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키워드를 검색창에 넣어보다 쇼핑몰도 기웃거리다 드라마가 끝남과 동시에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 지안이는 잘 놀아?

- 응. 잘 생각을 안 해.

엄마 없이도 잘 노는구나. 다행이네. 그럼, 다행이고 말고.

영화나 한편 볼까? 에잇,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보지 뭐.


Day 2

흔히들 빈집에 들어올 때 기분이 이상하다고 하는데 빈집에서 나갈 때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창문도 하나하나 확인했는데 여전히 무언가 빠뜨린 기분. 배웅해주는 사람도 없는 집을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서는 마음이 조급했다. 오늘은 기필코 제대로 된 자유를 누려야지 싶었다. 마침 모처럼의 회식, 막차까지 빼지 않고 달려주리라 다짐했다.

기다리던 회식 시간, 그런데 기대했던 분위기가 아니다. 다들 빨리 먹고 일어나자는 눈치. 2차로 들른 커피숍에서는 30분도 채 머무르지 않고 헤어졌다. 어라, 이게 아닌데. 아직 더 놀고 싶은데.

스마트폰을 열어 친구들의 연락처를 훑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잔하자 연락하면 좋다고 나와줬을 그녀들인데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프로필에서 그녀들의 사진이 사라진 것처럼, 그녀들의 시간도 지금은 그녀들의 몫이 아닐 것이다.

평소보다 빨리 누웠지만 평소보다 늦게까지 깨어있었다. 커피 한잔 안 했는데 왜 이리도 잠이 안 오는지 참.


Day 3

학창 시절 야영을 가면 마지막 날 밤에는 꼭 캠프파이어를 했다. 여행을 다닐 때도 마지막 밤은 가장 비싼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놀았다. 오늘이 바로 그 마지막 밤, 박제하고 싶을 만큼 뜻깊은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기필코!

퇴근 후 바로 귀가하기가 아쉬워 서성대다 들른 곳은 회사 앞 아웃렛. 출산 후 맞는 옷이 별로 없어 새 옷을 장만하기로 했다.

옷을 고르는 일이 어쩐지 생소하길래 따져보니 내 옷을 사러 나온 게 근 2년 만이다. 옷장에 걸린 옷마다 후줄근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옷가게 구석구석을 누비는데 눈이 습관처럼 아이 옷을 찾아낸다. 소재와 사이즈 같은걸 확인하다 작심하고 내려놓았다. 아이랑은 다음에 다시 와야지.

피팅룸을 세 번이나 드나든 끝에 마침내 계산대에 올려진 옷은 모두 아홉. 집에 오자마자 하나씩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티셔츠는 좀 별론가.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이러쿵저러쿵 말해줬을 텐데.

옷을 정리하고 나니 슬 배가 고프다. 저녁 먹는 것도 잊었다.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켰을 텐데.


Day 4

기차 시간은 10시, 지금은 8시 반.

가방은 지난밤에 다 챙겨두었고 입을 옷도 소파 위에 준비해두었다.

- 기저귀, 아기 식판, 약병, 그리고 또 필요한 건 없어?

- 아기 김도 좀 가져올래?
우리 딸, 집 떠나 어지간히 밥을 안 먹나 보다. 김까지 챙겨 오라는 걸 보면. 혹시 엄마가 옆에 없어서 그러나?

3~4일 지낼 옷에 아이짐까지 더했는데도 가방 하나가 전부다. 또 빠뜨린 게 없을까. 가뿐한 가방이 어색하고 혼자 기차역으로 향하는 기분도 어색하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 문득 침대 맡에 둔 책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읽으려고 했는데 깜빡 두고 왔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챙길까. 에이, 기차 시간 늦겠다. 남편이랑 아이가 기다릴 텐데. 일단 택시부터 잡고 보자.

기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영화, 책, 반신욕, 맥주.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아이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하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핑계였나 보다. 혼자 있으면 마냥 신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가장 신났던 순간은 남편이 내게 자유시간을 주겠노라 선언했을 때. 그 이후는 마치 직접 떠나보니 기대에 못 미쳤던 여행처럼 싱겁게 지나갔다.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전제였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늘 붙어 지낼 때보다 떨어져 지낸 며칠 동안 가족들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영화나 책 보다 아이 사진을 들여다볼 때 훨씬 행복했다. 미혼에서 기혼이 되고 엄마라는 타이틀이 주어지며 내 행복의 구조도 재편된 모양이다.

다시 가족들과 부대끼다 보면 싱겁게 지나간 이 시간이 그리울 테지?

혹시 또 모르겠다. 우리 남편, 이 글 보고 조만간 한 번 더 시댁에 머물겠다 할지도. 나 혼자만의 시간이야말로 그와 아이에 대한 내 사랑을 증폭시킨다는 메시지가 그에게 잘 전달되었다면 말이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도 특별히 반가워하지 않는 아이. 엄마가 그렇듯 네 맘속에도 늘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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