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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12. 2020

상전을 모시고 살아요

생후 18개월, 고집과 떼가 늘어나는 시기

누군가 매끼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준다.

저녁마다 노곤한 몸을 누일 따뜻한 물이 욕조에 준비되고, 뒤처리는 남의 몫.

거울 앞에 앉으면 좋다는 화장품을 듬뿍 발라주고 머리까지 바짝 말려준다. 내가 할 일은 거울 속 내 모습을 감상하는 것뿐.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 말 한마디에 모두가 움직여준다. 아니,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모두가 날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휴일이면 내 눈과 입을 호강시켜주기 위한 계획들이 마련된다. 난 그저 즐기면 된다.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면?

울어버리면 그만이다. 세상은 다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갈 테니까.


도대체 누구 얘기를 하는 거냐고?

사극 속 왕족이나 어느 나라 공주 얘기를 하는 거냐고?

놀라지 마시라. 나는 지금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건 또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범한 유아기를 거쳐왔다면 우리는 누구나 한때 상전이었다.


요즘 내가 모시는 상전은 태어난 지 막 18개월이 지난 분이시다. 할 줄 아는 단어는 오로지 셋(엄마, 아빠, 무-울)뿐이지만 본인이 원하는 걸 얻어내는 데 있어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주로 쓰는 무기는 목소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질러 결국은 이뤄내고야 만다.

이 분은 상대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울다 마침내 쉰소리가 나면 상대는 결국 책에서 본 육아 이론 따위 까맣게 잊고 항복하고 마리라는 걸.


지금까지 이런 상전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 폭군들에게도 최소한의 명분이라는 건 있다. 하지만 우리 집 상전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드러누워버린다.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우리 몫이다.

요즘 상전은 잠들기를 거부한다. 늦은 밤까지도 세상을 탐구하는 일에 열심이시다. 그런 상전을 모시는 우리에게도 잠이 허락되지 않는 건 당연지사. 안으면 내려달라 내리면 안아달라 물 달라 우유 달라 아니 다시 우유 말고 물!...ㅆㅎ~!5ㄷㅉ#$%


상전은 자기가 상전인 걸 아는 눈치다. 얼마 전 명절을 지나며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 모두가 자기만 보고 떠받들어줬으니까.

명절 전 상전의 할아버지는 큰 결단을 하셨다. 30년간 지속해온 차례를 생략하신 거다. 유행하는 전염병의 영향이 혹시 상전에게 미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 결단으로 절약된 가족들의 시간과 노동력은 온전히 상전의 시중을 드는데 쓰였다.

상전의 외할머니는 1년에 서너 번 방문하는 상전을 위해 집안에 있는 모든 서랍의 손잡이를 뽑고 모서리마다 스펀지를 붙였다. 상전이 들어갈 수 있는 좁고 위험한 공간은 모두 이불로 채웠다.

연휴기간 어른들의 식사메뉴와 동선, 일과까지 모든 결정에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던,

상전은 그야말로 상전이었다.


폭군의 신하들처럼, 남편과 나도 가끔 반란을 꿈꾼다.

상전의 변덕과 고집이 유난히 심한 날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잠들지 못하고 울었다. 자꾸 안기려고 하고 내려놓으면 다시 울었다. 냉장고와 정수기 사이를 오가며 쉴 새 없이 마실 것을 찾기도 했다. 그날 밤 상전이 마신 물과 우유를 합치면 족히 1리터는 넘을 것이다.

우는 그녀를 두고 거실등을 껐다. 반란의 시작이었다. 자리에 남편과 나란히 누웠다. 과연 그녀는 순순히 우리 계획에 따라줄까.

그럴 리가. 상전은 더 크고 날카로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데굴데굴 구르며 목과 다리를 마구 긁어댔다.

애써 무시하고 코 고는 시늉을 했다. 드르렁드르렁 요란한 코골이에 질세라 상전은 더 크게 울었다. 목에서 나오는 쇳소리와 박박 피부를 긁어대는 소리의 콜라보. 견디기 힘들어진 남편이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안아 올렸다.

몇 분 후 푸웁, 바닥에 다량의 액체가 쏟아졌다. 안고 있던 남편의 옷도 흥건하게 젖었다. 쏟아진 액체 사이에는 복숭아 몇 조각이 섞여있었다. 오전에 간식으로 먹인 복숭아.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거였구나. 오늘 그렇게 울어댄 이유가.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날뻔했다. 속이 편안해진 상전은 금세 잠들었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다시금 조건 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상전의 행동에는 오늘도 거침이 없다. 소파 등받이, 의자, 식탁까지 겁 없이 올라간다. 손에 닿는 건 뭐든 만지고 입에 들어갈 크기면 일단 넣고 본다. 안전은 우리 몫. 손에 닿는 것 중에는 만져서 안될 것들이 많고 입에 넣는 것 중에는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아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주위 사정을 들어보면 어느 집이나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아이들이 상전 대접을 받을 수 있 건 그들 옆에서 섬기고 받드는 보호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 행동이 지나치다고 여겨질 때마다 '아직 말도 못 하는데 조금 더 기다려주자' 생각하지만 어쩌면 핑계 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말하는 법을 배우'아직 어리니까,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으니까, 요즘 공부하느라 힘든 시기니까' 또 받아주고 참아주고 싶어 질 것 같다.

우리 상전, 버릇 나빠지기 딱 좋은 부모를 두었다. 눈물을 감추고 호되게 야단치는 연습도 좀 해야겠다.


상전을 보고 있으면 기억에는 없는 나의 유아기도 궁금해진다.

내 몸에는 눈에 띄는 흉터가 없다. 다리에 화상 자국이 하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생긴 흉터다. 흉터가 없는 걸 나 역시 한때 한 가정의 상전이었다는 증거로 여겨도 될까. 누군가의 시선이 늘 내게 닿아있었고 날 보호하고 있었고 내 필요를 채우고 있었다는 걸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군가의 상전이었던 나를, 어쩌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상전일 나를 스스로도 더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난 가고 싶은 대로 갈 테니 알아서 안 다치게 지켜줘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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