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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Jun 27. 2021

'아빠 또 놀러 와'가 되지 않으려면

부부의 적절한 육아 분담에 관하여

1년에 두 번씩 찾아오는 전보 시기다. 육아휴직 중인 내게는 의미 없는 시기지만 전보 대상인 남편은 관심이 온통 거기에 쏠려있었다. 부서가 정해진 다음에는 업무분장이 시작된다. 회사원들에게는 전보만큼이나, 때로는 전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업무분장'이다. 회사생활의 절반은 어떤 업무를 맡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로 결정된다.)

같은 회사에 속해도 업무는 천차만별이다. 모든 업무를 직원수대로 정확히 나눌 수 없다 보니 누군가는 조금 더 어려운 일을 맡게 되고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을 맡는다. 분장표에 없는 일은 모든 직원의 공동업무다. 문제는 주로 여기서 생긴다. 모두의 일은 결국 누구의 일도 아니기 때문에 공백이 자주 발생하는 영역이다.


남편의 부서와 업무가 정해졌다. 한 업무를 다른 직원과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업무분장은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겠지만 실무자는 별로다. 업무를 균형 있게 나누기 어렵고 나름의 원칙으로 나누더라도 항상 공백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공동업무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서로 눈치를 보다 감정이 상하거나 둘 중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며 속으로 불만을 키우는 경우가 다반사다.

남편의 업무분장 결과를 그 못지않게 궁금해한 사람이 나다. 집 밖에서 남편의 업무는 집안에서 그의 업무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퇴근시간이 늦어지면 가정으로의 출근시간도 늦어진다. 그의 공백으로 인해 늘어나는 집안 업무는 온전히 내 몫이 된다.


최근까지 남편이 속해있던 부서는 바쁘기로 손꼽히는 부서였다. 밤 열 시 이후에 퇴근하는 날이 절반 이상이었고 새벽 퇴근도 꽤 많았다. 퇴근 후에도 전화를 받고 다시 회사로 가는 날도 종종 있었고, 주말 출근은 예사였다. 팀 회식, 부서 회식, 동기 회식 등 회식의 종류는 어쩜 그리 많은지. 지난 일주일은 전보자 회식, 승진자 회식이 저녁시간의 남편을 앗아가 버렸다. 다음 달이면 새 부서에서 환영회식이다 뭐다 바쁘게 불려 다닐 일이 훤히 보인다.

남편이 늦는 날이면 본의 아니게 '독박육아'를 한다. 출산 후 독박육아를 우려하던 내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던 남편의 큰소리는 요즘 들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도 직장생활을 했기에 남편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몸이 지치고 마음도 덩달아 약해져 그 틈으로 여러 감정이 파고든다. 요즘 들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모빌보다 눈 맞추며 반응하는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아이라 혼자서 상대하기가 더 버겁다.

매일 아침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체력이 소진된 밤이면 아이의 시선을 은근히 외면하고 싶기까지 하다. 그러다 잠자리에 누우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죄책감은 종종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번진다. 좀 일찍 와서 놀아주면 안 돼? 싶다.


며칠 전에도 남편은 회식을 하고 열한 시를 넘겨 들어왔다.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있다. 그걸로 내 잔소리를 방어해볼 요량인 것 같은데 틀렸다. 아이를 재우고 혼자 엎드린 한 시간 동안 내내 남편에게 어떤 식으로 내 서운함을 털어놓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만 빨리 왔어도 아이스크림으로 내 입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요즘 나 좀 서운해."

눈치 빠른 남편은 술기운이 잔뜩 오른 얼굴을 하고서도 내 말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선수를 친다.

"미안. 내가 요즘 너무 늦지? 1차만 하고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이사님이 전보자들만 따로 부르셔서..."

계속 듣다 보면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버릴 것 같아 얼른 말을 끊었다.

"자꾸 아기를 나 혼자 키우는 기분이 들어. 먹이고, 똥 치우고, 씻기고, 재우고. 다 나혼자 하고 있잖아."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뻔한 레퍼토리다. 다행히 남편은 '대신 나는 돈 벌고 있잖아.'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육아휴직으로 직장에서의 8시간 근무를 면제받은 대신 집에서의 24시간 근무를 얻었다. 그렇다고 내일 또 출근하는 남편에게 '밤부터 아침까지 육아는 당신 몫'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는 언제 잠들지 알 수 없고 언제 깰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남편에게는 내게 있는 모유수유의 기능이 없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먹이기'를 담당하다 보니 주양육자로서의 책임감이 늘 따라붙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나머지 부분들도 먼저 고민하고 챙기게 된다.

내가 혼자서도 척척 알아서 챙기는 모습에 남편은 안심했을 것이다. 입장이 바뀌어 남편이 주양육자이고 내가 부양육자였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책임감이 더 큰 주담당자는 업무공백을 만들지 않으려 애쓰고 그 사이 속으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남편은 조금이라도 육아의 무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자꾸 이런 불만을 만들어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할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될까?'의 형식으로 묻는 남편, 나보다 한수 위다. 본인은 나의 어떤 처분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내가 본인의 상황을 고려한 적절하고 자비로운 수준에서 처분할 것이라는 걸 남편은 안다. 남편은 커다란 몸을 둥그렇게 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앉아서 대답을 기다린다.

"작은 거라도 오빠가 책임지고 챙겨. 예를 들면 손발톱 깎기나 영양제 먹이는 일 같은."

"응! 영양제는 매일 먹이는 거지? 손발톱은 얼마나 자주 깎으면 돼?"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남편의 대답에 웃음이 난다. 겨우 이 정도 업무분장으로 가라앉을 서운함이었나 싶어 나 스스로가 우스워지기도 한다.


회사 업무와 육아의 차이점이 있다면 대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서로 일을 떠넘기는 것이나 일방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회사에서는 욕 한번 먹으면 될 일이지만, 육아에서는 아이의 감정과 부모와의 관계, 크게는 아이의 자존감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부모의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며 자라기 위해서는 일방의 노력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육아휴직 중인 부모는 주양육자로서, 본업이 있는 부모는 부양육자로서 각자의 몫을 감당해주는 것이 서로에 대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아이의 건강한 자아를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육아는 장기전이다.

끊임없는 과제와 무수한 변수들로 똘똘 뭉친 고단하고 때로는 조심스러운 육아의 대장정에서 독박육아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마저 느끼지 않으려면 부모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이 지칠 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우고 북돋아 주며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줄 수 있다.

평일에 회사일로 너무 바쁘다면 주말에라도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 적어도 모 광고에서처럼 '아빠 내일 또 놀러 와.' 따위의 말을 듣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 마저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부양육자라면 적어도 이 시기의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함께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도 주양육자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다. 내 붉어진 감정이 금방 누그러진 이유도 고작 손톱깎기 정도의 업무분장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충분히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


다음날 아침, 남편이 잠든 아이 옆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한참을 조용히 있기에 다가가 보니 발톱을 깎고 있다.

"저녁에 혹시 또 늦게 마칠까 봐. 헤헤."

숙취와 수면부족으로 눈이 빨개진 남편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그냥 내가 다 할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서는 푹 쉬어. 나만 믿어. 자기는 돈만 벌어도 충분해.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앞으로도 영영 하지 않을 예정이다. 육아는 회사 일처럼 어쨌든 결과만 만들어내면 그만인 게 아니니까. 결코 쉽지 않지만 그만큼 소중한 지금 이 육아의 시간이 우리 셋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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