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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Aug 12. 2020

남편의 육아우울증

화장실 사용에 대한 사소한 불만을 말했을 뿐인데 남편이 평소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참을 말도 않고 급하게 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바쁜 척 자꾸 내 시선을 피하길래 붙잡고 이유를 물었더니 하는 말,

"나 지금 왜 이렇게 서운하지?"

내 불만사항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납득이 되는데도 이상하게 서운하다는 거다. 본인 스스로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단다. 요즘 별것 아닌 일로도 자꾸 서운하다고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무더위에 갈 곳 없는 강아지 꼬리처럼 축 늘어져있다.

"오빠. 그 이유 내가 알아. 왜 그러는지 내가 알겠어!"

남편에게 다가가 양팔을 뻗어 안았다. 남편의 넓은 등 위에다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이 지금 느끼는 기분을 언젠가 나도 느꼈을 때, 남편이 내게 해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육아휴직 2개월 차. 나는 10년 가까이하던 직장생활을 불과 1년 3개월 쉬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버벅대는데, 생전 처음 전업 육아인의 길에 뛰어든 남편은 더욱 낯설고 두려웠을 터.

그래도 남편은 정말 잘 해내고 있다.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매끼 세 가지씩의 반찬을 준비하고, 답답해하는 아이를 위해 매일 번거로운 외출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편이 보내온 사진 속 아이는 나와 함께일 때보다 훨씬 예쁜 옷을 입고 밝게 웃고 있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도 아빠와의 시간에 금방 적응했고 지금은 내가 집에 있을 때도 아빠를 더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남성 중심 문화인 직장에서 애엄마가 종종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육아하는 애아빠에게도 남모르는 고충들이 있다. 외출을 할 때면 남편은 화장실 사용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 기저귀는 수시로 갈아주면서도 정작 자기 방광이 차 오르는 건 참는다. 아이 밥을 먹이려고 찾은 수유실 앞에는 '엄마와 아이의 공간입니다. 아빠는 밖에서 기다려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며칠 전에는 아이랑 키즈카페에 다녀온 남편이 이런 걱정을 했다.

"다른 애들은 다 엄마랑 오는데 자기만 아빠랑 오는걸 애가 이상하게 여기면 어쩌지?"

아이가 걱정되어 한 말이었겠지만 내심 겨우 두 살 된 아이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내게는 엄마들뿐인 키즈카페에 들어서던 남편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별한 사람에게 똑같이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 위로가 되듯, 육아에 지쳐있던 내게 가장 위로가 된 건 다른 육아 동지들이었다. 깊은 새벽 비몽사몽으로 수유를 할 때나 땀 흘리며 자는 아이를 보며 멍하니 부채질만 하면서도 고립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육아 동지들과의 소통 덕분이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워킹맘으로서의 직장생활이 쉽지는 않지만 나보다 먼저 경험한 선배들이 있어 도움이 된다. 지금의 내 시간을 지나온 선배들의 현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힘이 된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동지, 그런 선배가 없다. 평일 오후 같이 카페에 가서 아이들을 옆에 앉혀두고 수다 떨 친구가 하나 없다. 익명으로 무심한 아내 욕을 털어놓으면 맞장구쳐주는 마땅한 온라인 커뮤니티도 없다. 육아 커뮤니티는 대부분 '여성'이라는 가입 자격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만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타기를 어색해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 중 하나인 남편은 최근 엄마들뿐인 키즈카페 문을 두드렸고 낯선 엄마들 틈에서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육아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시기 아이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검색하고 유튜브를 통해 아이의 발달상황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아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남편이 느끼는 우울감이 곧 육아에 대한 남편의 책임감과 부담감을 보여준다.

반면 나는 복직 후 회사일을 핑계로 육아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육아를 경험한 입장에서 남편의 고충을 이해하기보다 직장생활을 경험해본 남편이 날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가 잠 들고나면 미뤄둔 책 한 줄 더 읽고 싶어서 남편의 하루를 꼼꼼히 살펴줄 생각을 못했다.

남편의 우울감을 알고 많이 미안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겪어봤으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잠든 아이 옆에서 책 대신 스마트폰을 열었다.

- 하루 한번 이상 전화하기

- 아이 말고 남편 안부 묻기

- 동료들과 맛있는 거 먹을 때면 남편 것도 사다주기

- 10분 일찍 일어나 놀이공간 정리해두기

- 퇴근 후 남편 개인 시간 1시간씩 주기

- 남편 기분에 관심 갖고 자주 물어봐주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육아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하기. (그리고 나도 알기!)

남편이 서 있는 길은 발자국이 없는 길, 분명히 외로운 길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고민하고 기댈 수 있는 내가 있다는 걸 안다면 조금 덜 외롭지 않을까. 남편의 시간이 어제보다는 오늘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이는 아빠와의 시간에 금방 적응했고 지금은 내가 집에 있을 때도 아빠를 더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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