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의 인식론(2)
‘인식’과 ‘파악’
인식: knowledge(라틴어 cognitio), referred, conscious
파악: conceived,
1. 용어의 정의
에티카에서는 ‘인식’은 주로 ‘Knowledge’로 표현된다. ‘Knowledge’는 라틴어 ‘conscious’, 즉 의식한다는 의미이다. 영어에서 ‘Knowledge’가 사용된 것은 12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의 의미는 "상위, 명예, 예배에 대한 인정"이었다. 14c 후반부터 "알고 이해하는 능력, 친숙함" 또는 "알고 있는 사실이나 조건,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는 뜻으로 수용되었다.
비슷한 의미로 ‘파악’이 있다. 영어 ‘conceived’는 13c 후반, conceiven, "(씨앗)을 자궁에 넣다, 임신하다",라는 뜻과 라틴어의 ’concipere’ "받아들이다; 임신하다"의 의미가 있다.
이후 14c. 중반, ‘마음속으로 들어가 올바른 개념을 형성하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었고, ‘일반적인 개념으로서의 형태’라는 현재와 비슷한 의미는 14c. 후반에 가서 정착되었다.(온라인 어원사전, © 2001-2024 Douglas Harper)
하지만 에티카 라틴어 원본에서는 ‘Knowledge’는 ‘cognitio’로 ‘conceived’는 ‘concipi’로 쓰이는데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스피노자 자신이 특정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단수로써 인간에게 특정한 대상물이나 개념이 수용되는 상황을 그렇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스피노자의 '인식'이나 '파악'은 다시 우리에게 '인식'되고 '파악'되면서 스피노자의 그것과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Pars prima De Deo(제1부 신에 대하여)
AXIOMATA(공리)
II. Id quod per aliud non potest concipi, per se concipi debet.(라틴어)
II. That which cannot be conceived through anything else must be conceived through itself. (영어)
2. 다른 것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스피노자 자신의 경험이 아닌 객관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다른 것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는 가정은 그 ‘다른 것’을 인식하고 파악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지극히 단순하게 ‘다른 것’이라고 표현되는 이상 스피노자 내부의 '인식'이나 '파악'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음 구절의 “그 자신”은 역시 스피노자가 아닌 앞의 ‘다른 것’인데 이것은 라틴어, 영어 그리고 우리말에서 오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언어로 해석하든 엄격하게 스피노자가 아닌 외부의 사태에 대한 스피노자의 ‘인식’과 ‘파악’에 따른 판단인 것이다. 그 판단을 통해 스피노자는 이것을 신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AXIOMATA라고 주장하는 바)
그렇다면 이미 스피노자에게 '인식'되고 '파악'되어 공리로 완성된 “다른 것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스피노자의 '인식'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 문장을 읽는 우리는 이 공리를 해석 수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계, 즉 글을 읽고 있는 나의 독립적인 사고체계에서 '인식'하고 '파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 새로운 해석은 가능한가?(독자적이며 다소 거친 해석일 수 있음)
Pars prima De Deo(제1부 신에 대하여)
AXIOMATA(공리) 7
7.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본질에는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
위 공리 7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자.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이거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감각의 문제일 뿐,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논의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다.
그러면 두 번째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다면 당연히 그 이전도 이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어떠한 가정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본질을 가정하고, 동시에 ‘처음부터 없는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또 다른 ‘존재’를 개입시킨다. 신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논리일 수는 있지만 스피노자가 말한 기하학적 방법과는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즉 ‘존재하지 않는다고 파악할 수 있는 것’과 ‘본질’, 그리고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각각 모순된다. 이는 마치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점토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이 질문에 옹기장이들의 ‘점토’와 화덕장인들의 ‘점토’, 그리고 벽돌장이들의 ‘점토’ 각각의 것이 ‘점토’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점토’ 자체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쓰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네.(테아이테토스, 플라톤, 정준영 옮김, 이카넷, 2022. 39쪽)
이 장면은 ‘점토’라는 용어를 쓰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알고 쓴다는 의미인데, 역시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점토’라고 쓰는 순간 이미 우리는 ‘점토’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스피노자 역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하다. 즉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앞 문장에 이어 나오는 ‘본질’은 존재의 본질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의 본질인가? 스피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된 상황의 본질이라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소크라테스가 점토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점토’라는 지식을 가지는 것처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으므로 본질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다. 만약 본질을 쓸 수 있다면 존재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했을 당시의 상황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가능하다. 그다음이 결정적으로 오류다. ‘존재가 포함되지 않는다’인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본질이 있을 수 없고, 본질이 없는 상황에서 본질의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의 문장을 부정하거나 혹은 전체적으로 오류의 문장일 가능성이 높다.
JTB 조건은 만족하지만, 앎이 아닌 사례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게티어는 JTB 조건의 진리집합을 A, 앎의 진리집합을 B라 하였을 때, A-B에 속하는 반례가 있다고 말했다. 게티어의 이야기를 이 문제에 대입해 보자!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A, 비 존재의 ‘본질 속에 존재가 없다’는 명제 혹은 진리(스피노자가 더 이상 논증할 필요가 없는 공리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에)를 B라 한다면 A-B는 공백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