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는가! 박근혜 정부 시절, 반 민족적 친일 성향의 인사들이 정권의 비호아래 각 종 정부 기관의 기관장에 임명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한 적이 있다. 그래도 당시에는 임명될 그 순간에는 자신은 그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이야기하거나 과거 발언이 잘못되었다고 사죄 혹은 반성하는 연출이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정부에서는 더 편향적인 인사들이 그런 자리에 임명되면서 당사자들은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오히려 대중의 인식이 틀린 것처럼 이야기한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변방에 사는 일개 교사로서 참 무력감이 크다. 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글을 쓴다.
1. 3.1 운동 - 대한민국 정통성의 연원淵源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정확한 기록이 모호한 가운데 2002년 경세원에서 발간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에 의하면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총 1,542 회의 만세 집회가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의 민중 7,509 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15,961 명에 이르고 체포와 구금을 당한 사람은 46,948 명이었다. 이러한 참혹한 결과는 3.1 운동이 세계사에서 식민지에서 일어난 독립시위 중 거의 전무후무한 평화시위인데도 불구하고 일제가 무력으로 진압한 결과였다. 3.1 운동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방법을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것으로서 내부적으로는 더욱더 강력하고 비열한 통제를 가하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우리 대한국민은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역사적으로 3.1 운동 이듬해인 1920년 6월에 봉오동 전투가 있었으니 독립을 바라는 우리의 민중들은 아직은 무장 투쟁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로 정규 일본 군대와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을 것이다. 전장의 무대는 한반도를 벗어난 현재의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이었다. 그나마 봉오동은 우리의 두만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나 멀리 만주에서 홀연히 죽어간 이름 없는 독립의 영웅들을 생각하니 식민지의 아픔은 참으로 처절하기만 하다. 이 전투의 주인공이 홍범도다. 홍범도를 부정하는 무리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그가 구 소련의 공산주의자라는 것인데 이미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이 질긴 이념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별한다.
2. 친일파
‘친일파’라는 단어는 해방 이후 일제 치하의 문학사 연구와 문화사 연구의 대가였던 재야 학자 임종국 선생이 1966년 출간한 『친일문학론』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책에서, 친일親日은 ‘일본과 친하다’라는 정도의 뜻으로 정의되었으나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이 지칭하는 대상은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사회지도층 세력 중 ‘부일배附日輩’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부일附日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일본과 친하다’라는 개념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친일파는 ‘지일’ 혹은 ‘학일파學日派’ 그리고 일본 문화 전반이나 일본인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단순 ‘친일’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 구분은 조금 어렵다.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부역자들을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정부가 나치 부역자들을 처리한 것처럼 해방 이후 우리 정부가 민족의 입장에서 잘 정리하였더라면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문제의 50%, 어쩌면 70% 이상이 깨끗하게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문제를 제시하지는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이념의 개입이 있으며 동시에 내밀한 정치 공학도 잠재되어 있다.
아무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순화해서 표현하여도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배 속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우리 민중들과 그들에게 저항한 항일 애국애족 투사들을 모습을 완전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단 한순간도 일제의 본성을 잊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극일의 방법일 것이다.
3. 토착 왜구
일제강점기 애국지사 정암 이태현 선생이 쓴 『정암사고』에서 '토왜土倭’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 말은 곧 친일부역자란 뜻으로 사용됐다. 물론 이 ‘토왜’라는 말은 정암 선생의 창작물은 아니라 당시 널리 쓰이는 말을 정암 선생이 책에서 언급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이 ‘토왜’들이 실제 일본인들보다 더 민중의 삶을 핍박했던 모양이다.
당시 토왜의 기준은 대체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음에 제시된 조건은 현재에도 매우 유효해 보인다.
먼저 일본 우익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자들인데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를 일본 우익들과 똑 같이 이야기하는 자들이다. (지금 이 나라 곳곳에 그런 무리들이 있다.)
둘째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하다고 주장(조선에 대한 근대화론)하는 자들이다. 현재 많은 친일 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특히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학계의 지배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이것을 마치 객관적 역사관으로 포장하여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사실은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다. (주류 사학자들 중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편적 민족주의자라고 칭한다.)
셋째 일본 제국 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훈포상 및 상금을 수령한 자들인데 현재 이 나라 유수의 대학에 교묘하게 뻗어있는 일본 장학금으로 공부하거나 도움을 받은 정치인, 학자, 관료, 경제인들 중 일부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친일 본성을 드러낸다. 최근 자주 이런 자들을 본다. (현 정부의 고급관료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이 땅에서 그리고 타국에서 피 흘리며 투쟁하고 사라져 간 독립영웅들과 이 버러지 같은 토왜들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독립 무장 투쟁 중 1942~3년 사이 전사한 우리 조부는 아직도 그 신원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
또, 토왜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토왜와 비슷한 자들도 있다. 적극적으로 일본을 편들지는 않지만 자신의 가족과 삶의 안위에 관계없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좋다는 자들도 제법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식인들 중에 많으며 자신의 행위와 태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리화하여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이들은 잠재적 토왜로써 현재 드러난 친일보다 더 무서운지도 모른다.
기회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는다. 그들이 섬기고 받드는 것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이지 그것의 정당성이나 합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동시에 기회주의자들은 권력과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논리도 이념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