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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 卒, 兵

by 김준식

날씨가 참 춥다. 새벽에 걸으면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는데 한낮에 걸으니 바람 탓에 냉기가 더 심하다. 하루 종일 영하의 날씨다. 이런 날에는 모든 것들이 유연하지 못하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까지도 딱딱해진다. 인지상정이다.


요즘 헌재 재판을 보거나 국회 내란 관련 청문회를 보면서 오래전에 했던 비슷한 생각이 떠 오른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특히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말과 그 변호인들의 말은 보통의 우리를 장기판에 졸이나 병으로도 보지 않는 모양이다. 허구한 날 거짓말을 하고 또 그 말을 뒤 짚는다.


장기를 두면 제일 작은 크기의 말, 졸(卒)과 병(兵)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적인 특성은 후진이 불가능하다. 좌, 우, 그리고 앞으로 밖에 움직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장기 말판에서 최 전선에 있어서 최초 이들의 희생이 필수적이다. 어떤 경우에는 말(馬)과 코끼리(象)가 이 졸과 병의 희생을 발판으로 상대 공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한다. 따라서 졸과 병은 장기에서 희생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은 이 졸과 병을 잘 활용하여 상대를 공격하고 심지어 이 두 개의 말로 외통수 승부를 내기도 한다.


卒은 옷 의(衣)와 한 일(一)의 會意로 만든 글자다. 즉 옷 한 벌 밖에 없는 가난한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출발한 글자다. 졸은 전시에 옷을 갈아입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해 보면 좀 더 분명하게 그 뜻이 와닿는다.


兵은 좀 더 군사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도끼 근(斤)과 맞잡을 공(廾)이 합쳐진 역시 會意 자다. 즉 도끼를 잡은 사람들, 무기를 쥔 군사라는 의미가 강하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생산과 유지 발전의 중심에는 民이 있다. 民은 (새 봄, 새싹을 본떠 만든 象形 자) 대 다수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왕조 시대의 姓도 이름도 모르는 무지렁이로부터 최근의 보통의 우리들까지 이 사회를 이루고 유지하는 핵심 구성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대접이나 대우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하게 그 상황을 견뎌내고 있는 존재이거나 심지어 상황의 소모품으로 대우받기 일쑤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하늘과 맞먹는 民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다. 그리고 이 民은 똑 같이 사람을 뜻하는 人과 달리 언제나 저급하고 열등한 단어와 어울린다. (평민, 서민, 민속, 농민, 어민, 천민, 민화, 등등. 반대는 모두 人이 붙는다. 언론인, 정치인, 자유인, 등등)


民은 흔히 장기의 졸과 병으로 비유된다. 전쟁 혹은 국가적 과제의 소모품으로 사용되어 온 民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民이 主人이 되는 民主主義라는 제도에서 그 중심이 되는 듯하였으나 제도는 단지 제도일 뿐, 지금도 民은 여전히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중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고대 그리스 시절의 민주주의에서 民 역시 위의 내용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즉, 민주주의를 국가의 핵심이자 근본임을 대한민국 최고 규범인 헌법이 밝히고 있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이래로 줄곧 헌법 1조로 유지되어 왔지만 그 의미대로 국민을 대한 정권은 거의 없고 심지어 위에서 말한 장기의 졸병 수준으로 국민을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란을 일으켜 민중의 삶을, 국민의 삶을, 국가의 안정을 심대하게 흔들고 회복에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이 중차대한 상황에서… 달빛 어쩌고 저쩌고 하는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정신 상태는 바로 민을 여전히 졸로 병으로 보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한번 확인해 두지만 민은 졸도 병도 아니다. 민은 곧 국가이며 민은 하늘이다. 이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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