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30)
(2) 염려와 자기성(Selbstheit)[1]
시간성에 대하여 구체적인 검토를 위한 ‘선구적 결단성’의 논의는 일단 앞부분의 내용으로 충족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자기성(Selbstheit)’[2]개념을 유도해 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기성이란 두 개의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 존재론[3]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를 실존론[4]으로 보는 견해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하이데거가 자아를 실존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자아를 비본래적 존재인 세상에 물든 존재 모습을 떠나 본래적이고 독자적이며 실존하는 현존재로서 자아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세운 것은 현존재가 본래적이고 독자적인 실존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염려가 유지 혹은 담보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염려가 시간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기초가 세워지는 것이다.
데카르트나 칸트도 자기성에 대한 언급을 한다. 그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나’를 주관, 주체, 그리고 자아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자(res cogitans)’[5]라 하였고, 데카르트의 입장에 약간은 비판적이었던 칸트조차도 ‘나는 생각한다.(Ich denke)’의 주체로서 자아를 파악하였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이 말에 대해 이러한 해석을 더한다.
“분명히 칸트는 '나라고 생각한다(말한다)'에서 주어진 현상적 실상을 엄밀히 따르면서, 언급된 성격들에서부터 열어 밝혀진, 영혼의 실체에 대한 존재적 테제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단지 '나'에 대한 잘못된 존재적 설명이 퇴치되고 있을 뿐이다.”[6]
즉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자기성과는 거의 다르거나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이 말을 단서로 매우 장황하게 설명한다.
어쨌거나 현존재는 염려의 존재다. 그런데 그 염려의 근본 근거는 시간성이다. 여기서 근거라 함은 ~을 향하여(Woraufhin)[7]라는 뜻이다. 즉 현존재의 염려는 시간성을 향하여 열려 있다. 현존재는 피투된 존재이므로 피투 된 현사실성과 기투, 그리고 퇴락으로 구성되고 죽음으로의 선구와 그 선구에 기초한 선구적 결단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 아래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염려인데 그 염려가 이를 테면 시간성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과 시간성은 다르다. 시간성은 시간의 성격이나 구조를 말한다. 하이데거가 예로 든 시간성의 전형이 바로 하이데거의 염려다. 염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염려를 통해 시간성이 그저 확인될 뿐이다. 하지만 염려하는 현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구조(흐름의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현존재는 언제나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한 기투의 존재이며, 현사실적[8]이다. 그러나 현존재는 그저 피투적 존재일 뿐이다. 피투 된 존재가 현사실적으로 기투하고 있는 현존재는 피투로부터 기투하는 모든 행위가 전체적으로는 시간의 범위 안에 있다. 그런데 그 전체적 행위는 염려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현존재의 상황, 즉 우리의 삶 전체를 하이데거는 염려에 근거한 시간성의 구조로 해석한 것이다.
(3) 선구적 결단성과 시간성
거듭 이야기하지만 하이데거는 시간을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적 근거인 염려가 시간적 구조를 가질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앞서 이야기한 선구적 결단성[9]은 단적으로 현존재의 전체성과 본래적 가능성의 근거 중 하나였는데 이것을 타당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간성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를테면 선구적 결단성이란 현존재가 자신의 극단적 가능성인 죽음을 향해 달려가(죽음으로의 선구) 양심의 부름에 따라 결단하여, 본래 자기에 이르러(kommen),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기존(이미 있었던 존재; gewesen sein)의 자신을 회복하고 수용하여 자신의 상황을 현행화(Gegenwärtigen)[10]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래 자기에 이르러(kommen)’라는 개념은 과거 피투 된 시점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방향은 장래(Zukunft)를 향하고 있고, ‘자신을 회복하고 수용하여’라는 표현은 과거(Gewesenheit)라는 시간성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마지막의 ‘자신의 상황을 현행화(Gegenwärtigen)’한다는 것은 당연히 현재성에 대한 표현이다. 정리하자면 현존재는 자신에게 이르러(장래의 시점) (과거 일정 시점의 상황-본래적 자기) 회복 수용하여 그것을 현행화(현재) 하는데 이것은 장래, 과거, 현재라는 시간성을 근거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염려구조의 근원적인 통일성은 시간성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11]
[1]일반적으로 ‘자기성’이라고 번역한다. ‘이기심’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2]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자기성(Selbstheit)은 이러한 존재 방식의 핵심 요소로,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실현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자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가능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3]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와 같이 자아를 어떤 고정된 본질을 가진 존재로 보고, 그 본질을 실현하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는, 이를테면 자아를 주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는 입장.
[4]키르케고르,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염려와 불안의 존재로서 인간은 결코 고정된 본질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
[5]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성찰), 1641. 제2성찰(Meditatio II)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입증하기 위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를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을 '생각하는 것'(res cogitans) 으로 정의.
[6]SZ 11판, 1967. 318쪽.
[7]같은 책. 324쪽.
[8]자신의 존재 자체에 몰입해 있는 상황
[9]본서 176쪽 이하 참조
[10] (회복하고 수용한 내용을 참조하여)마치 이미 있어왔던 현재의 상황으로 만드는 과정. 단어의 뜻은 현재라는 뜻 밖에 없다.
[11]같은 책.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