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지하철 민폐캐 대전

쓰다 보니 혈압이 오릅니다.

아마 현대인이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교통수단 하나를 뽑으라면 자동차 아니면 지하철이지 싶습니다. 저는 직장이 서울이고 집은 경기도라 매일 지하철에서 최소 2시간은 보내게 되는데요. 직장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군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건만, 랜덤으로 만나는 '악당들'덕에 출퇴근길이 더더욱 다이내믹합니다. 


악당을 나타내는 말로 유명한 건 빌런(villain)인데, 저는 이 단어를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빌런의 어원은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로, 고대 로마에서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을 칭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귀족 입장에서 보면 냄새나고 툭하면 폭동이나 일으키는 위협적인 존재인 하층민이니 '악당'으로 보였을 법합니다만, 현대 회사의 노비인 우리가 이 단어를 쓰는 것도 좀 웃긴 것 같거든요.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피치 못하게 민폐를 끼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정도의 분들은 '악당' 카테고리에 끼워드리지 않습니다. 제가 '악당'으로 분류하는 분들은 나름 굉장한 분들입니다. 

딱히 제 브런치에 정리한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로워지거나 이런 분들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런 염원을 담아 (그리고 제 넋두리도) 이참에 정리해 봅니다. 낮은 레벨부터 고차원적인 악당 순입니다.너무 다양한 종류의 악당들 덕에 순위 정하는데 힘들었습니다.



Lv1 : 아임 스틸 헝그리 (음식물 섭취)

출현 빈도 : 하

공격력 : 하


히딩크 형님이야 배고프신 만큼 월드컵 성적이라도 잘 내셨으니 그러려니 합니다만... 뭘 그리 헝그리 하신 지 지하철에서 뭔가 드시고 계신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나마 어떤 분들은 조용히 입을 손으로 가리고 드시는데, 아니 왜 만찬을 여기서... 싶은 분도 종종 있는데요.

냄새가 심한 것만 아니라면야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 코로나 시국이라 노 마스크 어택과 시너지 효과를 내서 신경 쓰이는 타입입니다. 



Lv2 : 노 마스크 파워 당당 

출현 빈도 : 하

공격력 : 중


제목 그대로, 이태원 프리.. 아니 마스크 프리덤을 외치는 분들입니다. 자매품으로 턱스크, 코스크, 반스크 등이 있습니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는 분도 있지만 버티다가 열차 방송에 등장하시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더 버티다 보면 지하철 보안관이 출동하기도 합니다.



Lv 3 : 강제 라(이브) 방(송) 지옥 (통화 공유형)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중


급하면 지하철 안에서도 통화할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거래처 갑님이 전화하는데 안 받을 수 없는 그런 거 있잖아요.

문제는 그야말로 잡담.. 수다인데요.. 한 번은 충무로역에서 자리가 나서 운 좋게 앉았는데 옆자리에 그런 분이 앉으셨을 때였습니다. 경기 남부까지 약 20여 정거장을 가는 동안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시더군요. 덕분에 이 분의 인간관계, 재직 회사의 장단점(주로 단점), 사수가 왜 애인과 헤어지고 자기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이분 모친께서는 왜 임영웅을 좋아하는지 등 제 인생에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를 한 아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도 비슷한가 봅니다 (출처 : 시카고 교통국)


본인이야 노이즈 캔슬링 잘 되는 아이팟으로 조용히 통화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전후좌우 3m 내의 십여 명에게 라이브 중임을 아셔야 하는데 말이죠. (지하철 안이 조용할 때는 또 엄청 조용합니다.) 개인정보 보호 따윈 던져버리는 이 자발적 공표를 대체 어찌해야 할지... 1시간 동안 무던히 고민을 했습니다. 

'저기요 통화 좀..', '다 들리는데요.. '등등의 멘트를 고민했지만 40대 꼰대 아재의 잔소리 취급도 무섭고, 요즘 세상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가는 판국이니 그냥 버티다가 내렸습니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는 이런 유형의 악당을 만나면 아깝지만 자리도 포기하고 그냥 먼 곳으로 도망갑니다. 



Lv4 : 전통의 쩍벌남 어택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중


역사와 전통의 옆자리 쩍벌남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남자라고 정의하면 젠더 감수성 없다고 공격받겠으나.. 주로 음주 아재들이 많습니다. 옆자리에서 이렇게 공격 들어오면 저는 다리에 힘 꽉 주고 버티는 편인데 근력강화에 도움이 됩니다. 쩍벌에는 쩍벌로 대응을 권합니다. 



Lv4 : 샤론스톤 어택 (다리 꼬아 앉기)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중상


원초적 본능('92) 샤론스톤 누나의 유명한 장면 (아재 인증)


자리에 다리를 꼬아 앉는 유형입니다. 쩍벌남은 남성에게 많이 보이는 반면 이 유형은 여성들에게 많이 보입니다. 이 유형의 무서운 점은 공중공격입니다. 앞에 서 있으면 높은 확률로 제 바지에 상대방의 신발이 닿아요.

그래서 앞에 서 있을 때 꽤 신경 쓰입니다. 탑건 2에서 톰 크루즈의 F-18을 노리는 지대공 미사일처럼 '내 앞에 서기만 해라 가만 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거, 하는 사람도 골반 휘고 안 좋습니다. 본인 다리 긴 거 잘 알겠으니 제발 평범하게 앉아주셔요.



Lv5 : 저기요, 제 취향은 말이죠 (이어폰 볼륨 High)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상


최근 난청, 이명환자가 급증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중교통에서 이어폰 안 쓰는 사람 보기 힘든 게 현실인데요. 지하철 안이 원체 소음이 심하다 보니 다들 볼륨을 높이고 듣게 됩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지하철에서 듣던 볼륨으로 조용한 곳에서 들어보세요. 큰 소리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문제는 요즘 이어폰/헤드폰들이 기술이 좋아서 볼륨이 상당함에도 최대치로 주변에 본인 취향을 공유해주시는 분들입니다. '내가 곧 멜론이다' 이런 느낌인데, 꽤 괴롭습니다. 이런 분 덕에 제 볼륨도 높여야 하고 그러면 이비인후과 원장님들만 웃으시는 사태가...


미국도 비슷한가 봅니다 #2 (출처 : 시카고 교통국)



Lv6. 내가 맞다는데 니가 어쩔 거임 (임산부 좌석 점유)

출현 빈도 : 상

공격력 : 중


임산부 좌석은 높은 확률로 '임산부로 보이지 않는' 분들이 앉아있습니다. 제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닌데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제 자리가 아니라 생각되니 사실 무시합니다. 다만 만원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양보를 하지 않고 앉아있는 분들을 보면 좀 부아가 치밀어 오르긴 합니다. 얌체들 같아서요. 일종의 정신 대미지 공격입니다.

사실 임산부 배려석은 말 그대로 '배려'이기 때문에 눈치는 보일지언정 불법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저출산 국가인 현실을 감안하면 배려석을 의무석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하철 보안관이 돌아다니면서 증빙 확인을 하는 거죠. 많은 임산부분들이 누가 앉아있으면 자리 요구를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괜한 분쟁 일으키느니 그냥 가자'라는 생각이실 겁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자리가 무조건 공석으로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Lv7 : 닌자 거북이 (백팩 어태커)

출현 빈도 : 상

공격력 : 상


아 이거 괴롭습니다. 아니 회사 가는데 무슨 에베레스트 등반 가는듯한 거대한 가방을 등에 짊어진 정장 아재가 만원 지하철에서 제 앞에 있다고 생각해보면요.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옵니다.

밀도 좁은 곳에서 백팩은 한 사람 역할을 충분히 해 냅니다. (뭔가 가방이 열심히 일하는 느낌이네요) 이런 경험 꽤 많이들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가방은 앞으로 메라고 하지만, 잘 안 지키는 분들이 많죠.

대체 뭘 들고 다니시길래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가방은 선반에 올려두시거나 앞으로 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죽하면 뉴스로도 나올까요 (출처:SBS)



L8 :  입구 럴커 에그  (출입구 가로막기)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극상


전통의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에 보면 입구럴커 에그란게 있습니다. 본진이 공격당할 위기의 순간에 입구에서 딱딱한 에그로 변신해서 길을 막는 건데요. 적절한 타이밍에 이런 게 나오면 효과 만점이죠.


언덕에 왠 알이 하나 떡 버티고 있어서 길을 막고 있는 게 바로 럴커 에그(Egg)입니다. 이른바 '길막'입니다.


문제는 이게 지하철에서도 간혹 나온다는 겁니다.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닙니다만 당하면 그야말로 멘붕입니다. 환승역에서 우르르 내리고 타야 하는데, 거대한 체구의 아재가 입구에서 떡 버티고 있는 거죠. 내리고 타는 입구 한가운데에서 귀 막고 유유히 유튜브를 보고 있는... 장판파의 장비 같은 느낌이랄까요.

아니 말이 되느냐 진짜로 이런 사람이 있느냐 하실 수 있는데... 있습니다. 난 움직이기 귀찮다.. 알아서들 피해 가라 라는 거죠. 출입구 앞이면 문이 열릴 때 보통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옆으로 가서 피할 법 하건만 굳건히 버티는 유형입니다. 

저도 짜증 나서 미식축구 선수마냥 태클 한 적도 있는데요. 웬만하면 피해 가시길 추천드립니다.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는 부류가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참 많습니다.



L8. 라인 스틸러  (새치기)

출현 빈도 : 중

공격력 : 상


저는 서울역에서 환승하는데, 출근길 환승역은 그야말로 난리통입니다. 차 들어오고 문 열릴 때마다 오고 가는 인파가 엄청난데요. 난리통에 꼭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바쁘고 급한 거야 우리 민족 종특 이건만 한참 뒤에 있던 사람이 순간 이동하듯 쑥 나와서 중간 무시하고 들어갈 때 보면 혈압이 상당히 오릅니다. 눈치 레이저빔을 쏴 주도록 합시다. 정의구현 일갈도 좋습니다. 



Lv9. 지하철의 이상한 정책들 (네 줄 서기, 짐칸 제거)

출현 빈도 : 상

공격력 : 상


지하철 공사의 이상한 정책도 만만치 않습니다. 17년째 매일 지하철을 타는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기행(?!) 때문입니다. 

먼저 네 줄 서기. 서울역을 비롯한 몇몇 역에는 지하철 입구에 네 줄 서기가 바닥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양쪽 문으로 2줄이니 총 4개의 줄이 생기는데요. 

원래 2줄로 서는 게 일반적이나, 2줄로 서면 내리는 사람들이 길게 돌아야 하니 네 줄 서기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취지는 알겠는데, 현실은 엉망이죠. 외곽 줄에 선 사람이 첫 줄의 뒤에 선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는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꽤 여러 매체에서 지적을 했지만 전혀 고쳐지고 있지 않습니다. 길더라도 순서대로 들어가는 두 줄 서기가 맞지 않나 싶은데 말이죠.


네 줄 서기는 자연스러운 새치기 상황을 유발합니다.. (사진 출처:데일리안)



두 번째는 짐칸 없애버리기입니다. 지하철 미관과 제작비 절감 등을 내세우는데... 가방 둘 곳이 없어서 들고 있거나 발밑에 내려두면 혼잡한 가운데 사람 자리를 가방이 차지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현타 한가득이죠. 아니 대체 왜...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훌륭하신 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셨겠지 싶으나..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ㅠㅜ



마치며


짧게 쓰고 말자고 생각한 글이 쓰다 보니 계속 악당들이 생각나서 (...) 길어져버렸습니다. 미쳐 놓친 악당 유형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배려'가 아닐까 합니다. 같이 있는 공간에서는 조금씩 상대방을 생각해 주면 되는 건데요. 우리는 뭐가 그리 바쁘고 여유가 없는 걸까요.

회사나 집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지하철이니 이런 악당들은 갈수록 덜 보게 되길 기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원하는 것을 찾는 두 가지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