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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앨런 Mar 02. 2022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남들은 관심도 없고 듣지도 않는다

강한 배신의 기억이 있다. 5년 전, 20대 중반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었다. 혼자서 버틸 수 없어 최대한 이야기했다. 도와달라, 해결책을 알려달라 묻고 다녔다. 그러다 작은 공감이라도 누군가 해주면 큰 힘이 됐다. 위로받는 느낌에 속아 속사정을 허물없이 털어놓았고, 어느덧 내 약점까지 보여주고 다녔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땐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내가 멍청했다는 걸 깨닫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2일 뒤, 별로 친하지도 않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많이 힘들다면서, 괜찮아? 개랑 술 먹으면서 들었는데 너 진짜 어떻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위로해주는 거였지만, 극도의 불쾌감이 속에서부터 끓어 올랐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냥 재미있는 안주거리로 생각해 술자리서 가볍게 말하고 다녔다니. 그것도 내가 믿었던 사람이 그랬다 생각하니, 순진하게 마음을 털어놓은 나 자신이 바보같았다.

내 이야기는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상대방에게 체감되는 정도는 1/10000 수준이다. 남 이야기니 그럴 수밖에.

이야기를 들어줄 때는 몰랐는데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벽이랑 말하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여자친구나 다른사람이랑 카톡하고 있었고, 내 이야기가 끝나 자신의 턴이 되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연기'였다. 나 혼자 말하는 거였는데 왜 몰랐을까. 그만큼 사람보는 눈이 없었던 걸까. 그런 사람에게 내 약점을 털어놨다고 생각하니, 깊은 반성과 함께 나중에는 그 사람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아찔한 마음도 들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멍청하게 다른 사람을 믿고 계속 마음을 털어놨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상처받다 까먹고, 다시 상처받다 까먹길 반복하다 지난해 2021년, 아예 마음을 굳게 걸어 잠갔다. 정확하게는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때가 있지 않나. 누적된 생각이 행동으로 바뀔 때. 아슬아슬하게 차있는 컵도 물 한 방울에 넘치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켜야겠다 줄곧 생각해왔더니, 나 자신을 감싸기 위해 내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게 전대미문의 사건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그냥 가벼운 주전부리로 전락한다. 나한테 엄청난 자부심을 안겨주는 자랑거리들도 그저 그런 조롱거리로 뒤바뀐다. 최근 내가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을 보고 “야, 그런 걸 왜 그리냐, 나이 먹고 할 일 없냐"고 20년 지기가 가벼이 말하는 걸 보고, 한번 더 마음을 굳게 닫았다. 스멀스멀 마음의 자물쇠를 자꾸 열려는 순진무구한 내 감성을, 긴 세월 걸쳐 흉터가 전신에 새겨진 이성이 수시로 감시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상황이 더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야기하지 않으니 쓸데없는 참견들이 사라졌고, 내 주제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졌다. 이게 맞는 거라며 괜찮다고 생각해 힘든 일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했던 만큼 내 감정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아차 싶었다. 이대로 가면 원래의 나 자신을 잃을 거라 생각했고, 깊이 숨겨둔 마음도 고이고 고여 썩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침내 찾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서사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내 이야기를 제일 재밌게 읽어주는 사람은 바로 나다. 그리고 내 삶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 자신이다. 그리고 어디에다가 이야기하지 않을 두터운 신용을 가진 사람도 바로 나다. 누군가 내 서사는 나만이 기록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라 했던가. 맞다. 내가 적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내가 듣지 않으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내 마음을 내가 돌아보지 않으면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다. 내 이야기의 최고의 독자이자 작가이자, 나를 가장 좋아하는 나 자신을 두고 너무나 긴 시간을 돌아왔던 것이다.


말로 나 자신과 대화하면 듣고 말하기를 동시에 하니 집중이 힘들다.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바로 '글쓰기'다. 내가 나 자신에게 글로 털어놓고, 다음날이나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읽는 방법으로 대화하는 식이다.


전날의 나 때문에 이불킥해도 뭐 어떤가.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 읽었으니 어디다가 알려질 일도 없다.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가장 든든한 사람과 되돌아보니, 마음을 섬세하게 닦아내고 날카롭게 가다듬을 수 있다. 생각하지 않고 툭툭 던지는 타인의 말에 더럽혀지지 않으니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글로써 순간의 경험과 감정들을 객관화하니, 전에는 몰랐던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 시작하면서 불안했던 마음은 하나하나 정리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홀로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어졌다.

글에 알맞은 분위기의 사진이 더해진다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글이 하나하나 쌓여갈수록 마음과 정신은 단단해졌다. 글로 나를 되돌아보기 시작한 이후 힘들거나 우울하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에게 펜을 한번 잡아보라 한다. 콧방귀를 뀌는 사람, 한번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 당장 어떻게 쓰면 되는지 물어보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누구나 글쓰기를 시작하면 숨어있던 자신을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길이 보인다는 것.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상대방이 있는 사람은 그 이에게 마음껏 털어놓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순간의 감정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는 대신, 약점까지 드러낼 정도로 힘들어하는 대신, 술 취해 털어놓는 대신 한글자라도 끄적이며 자신과 이야기해보자. 당신이 찾아오길 그 누구보다 기다린 사람이, 반가운 마음으로 진심 다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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