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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앨런 Mar 15. 2022

적는 만큼 느낀다

기록하는 만큼 다양해지는 감정 스펙트럼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 퇴근 후 해가 떠있는 3월 초 따스함, 주황색과 보라색이 흐트러진 저녁노을, 돌덩인 줄 알았는데 일광욕 중인 검은고양이, 자전거 타다 스친 라일락향 등이다. 난 이때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 최대한 글로 많이 적어둔다. 정보가 아닌 느낌 위주로.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같은 장면을 마주한다. 출근해 업무를 마친 다음 침대에 눕기까지 정해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똑같은 패턴으로 인해 기계처럼 변해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반복되는 삶에 뇌는 일상을 단순하게 처리하고, 오늘과 어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고, 24시간이 2시간 4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루 중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는 있어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일상이 반복되는 사람일수록 최대한 감정을 기록해야 한다. -회사-회색빛 일상막기 위해서다. 이때  글은 감정의 좋은 영양분이 된다. 평범한 순간이라도 기록을 거치면 '감각(感覺)' 되고, 적은 만큼 섬세해진 감각은 '감성(感性)' 된다. 이를 통해 세상을 다채롭게 느낄  있고, 다양해진 감정 스펙트럼에 일상이 풍요로워진다.


지하철서 잠만 자는 사람과 따뜻한 햇빛, 사람들 말소리,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느끼는 사람은 장르가 다른 영화라 생각한다. 전자는 '흑백 고전영화', 후자는 '풀컬러 로맨스영화'처럼. 작은 순간이라도 다르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그저 똑같은 월화수목금이 아닌 소소한 이벤트로 가득한 기념일이 되고, 평범함 대신 다양한 색깔로 수놓는 일상일 것이다.

봄기운이 트는 3월에는 퇴근 후에도 깜깜하지 않아서 좋다. 덩달아 뭔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도 생긴다.

난 어렸을 때부터 환절기를 좋아했다. 겨울에서 봄이 될 때는 가벼워진 옷틈으로 들어오는 온기가, 봄에서 여름으로는 하늘하늘한 옷과 나무그늘의 시원함이 좋다. 특히 '여름→가을'을 가장 좋아하는데, 피부를 감싸는 서늘한 기운과 찾아온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은 느낌"에 두근거리기 때문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는 무심코 내뱉던 콧김과 입김을 눈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이러한 느낌은 전부 어렸을 때부터 굳어진 것들이다. 모든 게 처음인 기억은 강렬히 새겨진다. 그래서 10대 때 느낌은 평생의 감성을 좌우하는 '확정 감정'이다. 첫인상처럼, 기억도 첫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합정에 갔을 때 마셨던 커피와 기온, 바람 등이 박제돼 그곳을 갈 때마다 되살아난다. 마찬가지로 삼청동을 갈 때면 17살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래서 내가 삼청동을 그렇게 좋아하나보다.   


쓰는 걸 좋아하니 자연스레 읽는 것도 좋아한다. 2007년도에 싸이월드에 적어놓은 글을 발견하면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워하고, 나머지 글을 연달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최근에는 동영상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고, 글은 그때의 감정을 마주하게 해주지만, 동영상은 모든 걸 합쳐놓은 종합체다. 순간의 파편을 떼어다 저장해놓는 느낌. 다시 볼 때 몰입도도 엄청 높다. 편하게 촬영할 수 있는 지금에 태어남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촬영한 동영상을 캡처하면 괜찮은 사진이 나오기도 한다.

글, 사진, 영상 등으로 감성을 세밀하게 기억하두니 감정은 더 섬세해졌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게 됐고,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에 잠시 멈출 수 있다. 내가 어떤 순간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고 있으니 행복한 순간만 모아 하루를 꽉 채울 수 있다.


감정 기록은 내게 좋은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좌절, 고난, 우울 등을 과거에 어떻게 극복했는지 저장해 미래의 내가 잘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행복, 사랑, 즐거움 등 긍정적인 감정을 기록해 나중에 힘들거나 지칠 때 기운을 돋궈준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만의 '실록' 다이어리는 더 나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를 쓰는 사람 대부분은 다채로운 감정의 소유자다.  일기를 통해 마주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고, 그런 이가 기록하는 만큼, 나만의 솔직한 감정들이 담겨있다.

두번째 체육관까지 깨고 세이브 파일이 날라간 기억은 나를 더욱 기록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기록 없는 삶은 세이브하지 않는 게임과 같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먹는 우리는, 다음날이 되면 '감정레벨 1'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어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리기 힘들다. 그래서 하루를 보내며 올려놨던 감정레벨을 '기록'이라는 세이브파일을 통해 보존하면서 감성을 키우는 거라 생각한다.


포켓몬을 포함한 각종 게임주인공들이 세이브를 할 때 왜 '일기장 형식'으로 저장하겠는가. 그만큼 일기장은 한 사람의 출발선을 다르게 만든다. 짧은 글이라도 일상을 적어나가야 한다. 하루를 보내면서 쌓인 감정이 유지되는 사람은, 그만큼 다채롭게 느끼며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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