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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잼 Jul 31. 2023

태풍이 온다

2023-07-30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지독한 폭우였다. 눈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물기를 덜어내도, 눈 앞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이런 날씨에 운전이라니...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을 놓치면 2주 동안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무리해서라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차 안에는 나 혼자였다. 보통은 혼자 이동할 때는 자차를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폭우 속에 혼자 덩그러니 차 안에 남겨진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음악도 틀 수가 없었다. 빗소리가 너무 커서 혹시나 다가올 위협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계식 세차를 할 때, 차 속에 혼자 있는 기분이랄까. 지금 감정을 뱉어내면 폭우가 남김 없이 씻어내 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 마음을 뱉어내지 못했다. 나는 아직 이 감정을 씻어낼 마음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냥 고이고이 간직하고 아파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비가 오면 나를 떠올려주길 바랐기 때문에, 나는 비몰이에요. 그래서 내가 어디 갈 때마다 비가 온다고 그 사람에게 이야기 했었다. 그건 아주 은밀한 암시였다. 나의 암시에 그는 놀러가는 날짜마다 나의 스케줄을 물어오곤 했다. 이번 주는 얌전히 집에 있을 거냐며. 자기는 놀러 가야 한다며. 그러니 집에 있어 달라고. 그러나, 비가 오면 오히려 내가 그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 날씨에 놀러가다니, 잘 놀고 있을까? 오가는 길에 사고는 없을까? 감기 걸리진 않을까? 비가 와서 여행을 망치지는 않았을까? 비가 내 마음을 그에게 묶어 버렸다.


폭우에요. 정말 무섭네요.


태풍이 오고 있다네요. 운전 조심하세요.


일기예보를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나에게, 최근에 알게 된 지인이 태풍 소식을 전했다. 이 폭우는 태풍이 올 조짐이라고 했다. 그랬구나. 지금 내 마음이 울렁이고 있는 것은 어쩌면 곧 다가오는 태풍 때문이었구나. 나는 조만간 참지 못하고 툭, 그에게 마음을 뱉어버릴 것만 같다. 3주. 당분간 그를 만나지 못한다. 나는 이 그리움이 몰고 올 태풍을 생각한다. 태풍이 지나간 뒤,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나면, 이 마음의 잔재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까. 나는 이 비가 조금 더 내 마음을 묶어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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