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7

전화번호

by 고성프리맨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미안.”

”괜찮아. 나도 몰입해서 듣고 있었어. 창훈아 너 힘들었겠다.”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내 운명인걸.”


위로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내내 괴로워하는 창훈이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난 더 얘기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갔네. 너만 괜찮다면 내일 이어서 얘기 나눌 수 있을까?”

”당연하지. 들어주는 게 뭐 어렵다고. 배고프지? 밥이나 먹자.”

”고마워. 밥 내가 살게. 뭐 먹을래?”

”아니야 오늘은 내가 사줄게. 내가 잘 아는 집이 있는데 가자.”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창훈이가 새로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오늘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타인 입장에서도 이렇게 심란한데 직접 겪었을 일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창훈이의 죽은 누나들에게 명복을 빌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다시 아까의 얘기들이 떠올랐다. 요즘 기분 나쁜 꿈을 계속 꾸던 상황이라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제 그 장소에 누워 있다. 같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어? 여기 이 분 일어나셨어요!”


’뭐지.’


눈을 반짝거리며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모인다.


”아무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뭘 봤나요? 얘기 좀 해줘요.”

”혹시. 거기서 어떤 남자 한 명 못 봤어요? 우리 형도 저기로 갔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다.


”천천히 한 명씩 부탁해요.”


그리고 어제 갔던 집이 있던 곳을 창밖으로 쳐다봤다. 여전히 불빛이 하나 비치고 있다.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누군가를 만나긴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


다시 가봐야 할 거 같다. 사람들이 순서를 따져가며 물어본다. 하지만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미안해요. 저 다시 좀 가볼게요.”


사람들을 뿌리치고 내달려 밖으로 나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래도 한 번 가본 길이라고 오늘은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랜턴을 깜빡했네. 어쩔 수 없지.’


어느새 건물 앞에 도착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주저함이 사라졌다. 캄캄한 계단을 조심해서 올라간다. 꼭대기 층에 가까워져 가는지 불빛이 새어 나온다. 꼭대기 층에 도착했는데 저번에 본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다. 의자 앞으로 다가간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양초들이 타고 있다.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쩌면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일 수도.


사람이라고 얘기를 해야겠지만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게 쉽진 않았다. 형체상으로 여자로 짐작이 되긴 한다. 긴 머리에 마른 체형 그리고 원피스를 입고 있다. 신발은 신지 않았다. 진흙길이라도 걸었던 건지 발 상태가 말이 아니다. 다리에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보였고 멍 자국도 많다. 얼굴은 눈이 하나 없는 상태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자리에서는 벌레 같은 것이 기어 다니고 있다. 머리는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붓기가 있는 편이며 피부는 폐건물의 콘크리트 색처럼 바래 있다.


’죽은 사람이다.’


끔찍한 모습도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 옆까지 걸어온 건가? 아까는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여자가 입을 움직인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힘겹게 한 글자씩 얘기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잘 움직이지 않는가 보다.


”저 잠시만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조금만 입 모양을 정확하게 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내 말을 알아듣긴 할까?’


여자와 나만 있는 어둠 속의 이 공간이 이상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마냥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여자의 입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 와”


입으로 소리를 따라해본다.


”결.. 혼.. 해 줘요.”

”나와 결혼해 줘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이 상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결심이 섰다.


”전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내가 봤을 때 당신과 난 함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거 같아요. 무슨 일이 분명 있었을 거 같지만 미안합니다.”


여자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말을 이어가야 한다.


”억울한 사연이 있다면 차라리 도와달라고 하세요. 하지만 결혼만큼은 함부로 약속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공포심을 극복했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냈다. 여전히 살기를 뿜어내는 그 여자의 한쪽 손이 내게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살짝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있었는데 뭔가가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을 살펴보고 종이를 집었다. 지역번호가 있는 전화번호의 형태이다.


’외워야 해. 되뇌자.’


무조건 외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반복해서 머리와 입으로 쉴 새 없이 전화번호를 되뇌었다. 번쩍 눈이 떠졌다. 잠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가지 않았지만 머리맡에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대로 번호를 하나씩 적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