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걸음
현재시간 12시 26분.
아내가 알바를 그만둔 이후 살짝 늑장을 부리게 되었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나게 되었는데(오전 8시 정도), 뭔가 미묘한 어긋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더니 잘 돌아가던 톱니가 작동을 하지 않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관성처럼 움직이려면 정해진 시간대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최곤데..'
루틴이 살짝 깨지니까 1-2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리곤 한다. 그 결과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다시 원래의 리듬을 되찾아야 해.'
매일 같은 시간대에 몸이 움직이도록 세팅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는데 망가뜨리기는 식은 죽 먹기구나.
12시 31분.
청소에 필요한 빨래를 돌렸다. 빨래는 매일 해도 어째서인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빨래래 봤자 직접 손빨래하는 게 아니다 보니 크게 어려운 건 없다. 세제와 섬유유연제의 양을 맞춰서 돌리면 끝. 건조도 건조기가 생긴 이후로는 너무나 쾌적하게 사용 중이다.
'일단 됐고.'
평소 같으면 글부터 썼을 텐데,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았다. 시험 공부할 때 공부 빼곤 다 재밌는 것과 유관하다.
오늘은 아내가 교육받는 과정의 마지막 수업이 있는 관계로 점심은 혼자 차려 먹어야 한다. 알바를 그만두고 나면 붙어 있을 시간이 늘어날 거라 생각해 좋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마 나랑 붙어서 삼시 세끼를 같이 먹는 상황자체를 아내는 반기지 않을 게 분명 하나, 같이 있으면 내게 유리한 점이 많은 걸 어떡하지?
"각자의 시간 좀 가지자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 배는 크게 고프지 않다. 아침을 먹고 난 뒤 별다른 신체활동을 하지 않아서 더 그런 거 같다. 칼로리 소모라도 많아야 허기짐을 느낄 텐데, 지금은 단지 '시간이 되었으니 먹어야 하지 않겠어?'와 같은 의무감에 가깝다. 그래도 아마 먹기는 먹을 거 같다.
[12:40]
딱히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데 오늘따라 유달리 시간을 살펴보게 되는 거 같다. 아침에 잠깐 차를 몰았었는데 날씨가 쌀쌀해져서인지, 바퀴에 나사가 박혀서인지 [타이어 공기압 주의] 경고등이 떠있었다. 신경을 자극하는 알람음과 화면에 떠 있는 노란색 표시를 보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째냐고..'
얼마 전에도 타이어에 나사가 박혀 경고가 뜨는 바람에 카센터에 갔다 왔는데, 또 가야 하다니. 아마도 최근에 동네에 올레길 조성한다고 공사하는 통에 여기저기 나사가 굴러다니는 탓인 게다. 오늘은 비가 오기도 하고, 시간을 보아하니 점심시간이 겹쳐있어서 카센터는 내일 들러야겠다.
문득 바퀴 교체 주기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다. 22년도부터 탔으니 2년 좀 넘었는데 '언제 바퀴를 교체해야 하는 거려나?' 인터넷에 검색해 대충 찾아보다, 답변이 제각각인걸 보고는 귀찮아져서 창을 닫았다.
'그냥.. 내일 점검할 때 타이어 언제 교체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자.'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게 낫겠지.' 하며 생각을 멈췄다.
12시 46분.
'그나저나 뭘 먹지?'
배는 고프지 않지만 뭔가는 먹어야겠고, 가볍게 먹는 건 어떨까.
냉장고를 열어보니 요거트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냉동 블루베리와 아몬드를 곁들이면?
'그래. 그렇게 먹자. 그런데 글은 언제 쓰게?'
막상 먹으려고 생각했더니 자꾸만 쓰지 않은 글이 눈에 밟힌다. 성격상 쓰기 전까진 계속 불편하게 얹힌 것 마냥 계속 생각날 게 뻔하다.
노트북을 펼치고 시간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고민하기 시작한 지 벌써 20분 정도 지나갔구나.
12시 50분이 되었다.
'잠깐 바깥 구경이나 할까?'
뜬금없이 집중력이 흩어지며 기분전환이 하고 싶어졌다. 바깥 풍속은 어떤지, 강우량 체크 및 바다의 평온도 등을 유심히 살펴봤다.
'제법 파도가 높네.'
바다에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잔뜩 성난 바다를 보고 있자니 괜히 으스스해졌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으면 이 또한 아름답게 보였겠지만, 바다가 무섭게 보이는 걸 보니 오늘은 그냥 집에나 있어야 되겠구나.
'애초에 나갈 생각도 없었는데 새삼스럽긴.'
조용하다. 노트북 키보드에 손가락만 올리고 있는 나도 조용하고, 복도에서도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치 나무가 된듯한 기분이다. 가만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최소한의 움직임을 가지는 것에 가깝다. 주황빛의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타닥거리며 움직이는 손가락과 화면을 번갈아 바라본다. 정신 산만하게 흐트러졌던 집중력은 어느샌가 돌아왔고, 노트북과 내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진다. 고요함 속에 타자 치는 소리만 귓가에 울린다.
12시 58분이다. 아직 13시가 되기엔 2분이 남았다.
'잘하면 13시에 맞춰서 글을 다 쓸 수 있겠는데?'
노트북을 꺼내 화면을 열고 의자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던가.
'이따가 하면 어떨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실체 없는 고민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거다. 왠지 점심 먹을 자격이 주어진 기분이 들었다. 누구도 자격을 부여해 주지 않기에 스스로 부여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비록 자격요건이 너무 허술하고 통과하기 쉬운 느낌이 들지만 괜찮다.
13시 안에 마무리 짓기를 고대했으나 오버됐다. 시간을 살펴보니 [13시 5분].
쓰기로 고민한 순간부터 40분 정도가 지나갔다.
오늘의 글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기록?
쉽게 흩어지고 마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남기는 것?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모습도 기억하고 싶었던 걸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또한 무의미함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나 잘 지내고 있어요. 무리에서 이탈했지만 잘 살아가고 있다고요.'
혹시 조난신호 같은 걸까?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틀에 갇혀 있는 까닭인 게다.
1시 11분.
정처 없이 떠돌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던 글을 정리했다. 맞춤법 검사를 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지만, [발행]에 앞서 망설여졌다. 여느 날처럼 눈 딱 감고 클릭하면 되는 일인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힘들다.
'그래도 글이 써진 이유가 분명 존재하지 않겠어?'
'망설임을 멈추자. 고민의 시간을 끝내자.'
오늘따라 유달리 망설여지는 이유는 뭘까?
망설임의 원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결국 고민을 안은 채 무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글을 발행해 본다.
[발행시간 13시 2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