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성프리맨 Nov 04. 2024

상사상애의 꿈

그냥 써 보는 이야기 18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무슨 소리야 수아야? 갑자기 왜 그래? 아- 내가 며칠 전에 서운하게 해서 그래?"

"아니야 오빠. 애쓰지 마 이제. 노력으로 안 되는 상황도 생기더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우리 좋은 모습으로 헤어지자."

"왜.. 왜 이래? 혼자서 정리하고 헤어질 거면 상의라도 하던가. 왜 혼자 그러는데?"

"악수.. 하자.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많이 좋아했었어. 먼저 그만하자고 해서 미안해. 그냥 내 뜻에 따라주면 안 될까?"


오빠는 뭔가 말을 더하고 싶었던 거 같지만, 결국 꾹 참은 채 내가 내미는 손을 거칠게 탁 치고는 먼저 나가버렸다. 차라리 잘됐어. 어떻게 내가 바라는대로의 깔끔한 이별이 가능하겠어. 이 정도면 된 거야. 뒤늦게 손등에서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어나서 나가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20대의 내 사랑은 결국 헤어짐으로 끝나버리는구나.'


그토록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뱉은 말이었건만, 바보같이 왜 눈물이 또 나는 건지. 이럴 거면 그냥 좀 더 참았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막상 저지르고 나면 속이 후련할 거라 생각했는데, 당장에라도 뛰쳐나가서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미안. 놀랐지? 농담이었어. 그러니까 잘하라고.'


지금이라면 혹시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시 오빠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는 있을까?


한번 후회가 시작되자 끝이 날 생각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내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잘 가 나의 사랑. 나의 20대.




결혼이 하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아니 수아야. 한창 좋을 나이에 벌써부터 결혼 생각이야?"

"여행도 좀 다니고,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천천히 생각해도 안 늦어. 요즘은 20대에 결혼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다?"


주변 친구나 지인에게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했더니 다들 발 벗고 나서서 너무 이르다고 했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스로 봉인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그런.. 가? 근데 난 빨리 내 옆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너무 불안해서 빨리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으면 좋겠어.'


결혼을 사랑이 아닌 도구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일찍 결혼해서 날 낳은 부모님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비록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넉넉한 생활을 하진 않으시지만 두 분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내게 시샘의 대상이자 부러움이었다.


"엄마. 왜 그렇게 빨리 결혼했어? 결혼했더니 좋아?"

"엄마 때는 다들 일찍 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소개받아서 했지 뭐."

"아빠 안사랑했어? 데이트는 안 했어?"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했는 걸. 우리 땐 그런 거 잘 안 했어."

"그게 뭐야. 너무 재미없잖아. 뭐 하러 결혼한 건데?"

"아니 얘가. 쓸데없는 얘기를 왜 자꾸 물어본대? 왜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누구 만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엄마 얘기가 궁금해서."

"아휴 몰라. 그냥 사는 거지. 궁금하면 아빠한테나 가서 물어봐."

"싫어. 아빠한테 물어보긴 좀 그래."

"아휴 알아서 해라. 엄마 밥해야 해."


맨날 대답하기 싫은 일 생기면 밥 한다고 도망이나 가고.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오늘도 아빠가 좋아하는 반찬 해주겠지. 엄만 늘 그랬어.




"둘이 인사해. 여긴 우리 과선배 경원오빠야."

"안녕하세요."

"안녕. 수아 맞지? 얘긴 들었어."


별 거 아닌 인사였을 뿐인데 얼굴이 빨개졌다.


"얼씨구? 너 뭐 해? 얼굴은 왜 붉히는데? 너어~?"

"아니야!"


그는 말없이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웃는 것도 무표정도 아닌 묘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황급히 고개를 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이 느껴져서 괜히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술을 마시다 보니 살짝 취기가 올라와 긴장이 풀려있었다.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니야?"

"네?"


다시 또 긴장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시라고. 술 좋아해?"

"아니요. 그냥 조금 마시는데요."

"보니까 잘 마시던데? 난 술 잘 못해. 안주도 좀 먹고."


누가 봐도 평범한 대화였는데 그때의 난 그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었다. 왜 굳이 나를 챙기는 거지? 내가 마음에 드나? 그러고 보니 여친있는 거 아니야? 왜 말 걸지?


"무슨 생각해?"

"에..?"

"너 특이하다. 같이 마시자."


평범한 과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인데. 처음 보는 낯섦이 주는 긴장감은 술과 함께 조금은 사라졌다.


"번호 알려줄래?"

"네?"

"여기-"


자연스럽게 번호를 알려줬고 그 뒤로 우리는 여러 차례 따로 만났다. 사람들과 함께 보기도 하고 따로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 보니 여느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딱히 오버하지도 않고 적당히 스며들듯 우리는 가까워졌다.




"저.. 손님. 일어나세요."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음... 어.. 엇?!"

"저 죄송하지만 문 닫을 시간이 돼서요. 이제 정리해 주셔야 해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나 보다. 황급히 테이블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아.. 나 오늘 헤어졌지?'란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뭐야. 벌써 보고 싶다고? 그럴 거면 뭐 하러 헤어지자고 한 건데?'


눈물이 핑 돌았다. 수 없이 괜찮을 거라고 상상 속에서 헤어짐을 반복했었는데도 이별의 순간만큼은 눈물을 만드는구나. 


20대를 거진 함께 보냈던 사람을 떠나보낸다 생각하니 아쉬워서 그런 걸까? 

나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내년이면 나도 서른인데.. 뭐 한 게 있다고 벌써 서른인지.


카페 바깥으로 나왔을 때 오빠는 서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 대체 뭘 바란건지. 드라마를 너무 봐서 그런가. 현실은 역시 현실이구나. 문자가 와 있지도 않았다. 자꾸 미련이 남는 건가? 이제 와서 남겨 놓은 미련이 무슨 소용이람.


'내가 꿈꾸던 결혼도 깨졌어. 그래 내가 무슨 결혼이야.'


집에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결혼은 정말 꿈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그래도 잘했어.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간 꼭 얘기했어야 되는 거였잖아.'


앞으로 그가 없는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 비록 지금은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기분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아쉽고 부족했던 나의 20대 안녕. 


십 년 정도 지나서 오늘을 떠올리면 그때는 좀 더 홀가분해져 있을까? 

그때의 난 바라는 바를 이루고 있을까?


부디 십 년 뒤의 내가 지금보다 행복해져 있었으면 해. 부디.

매거진의 이전글 슈뢰딩거의 뒤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