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걸음
'이렇게 놀다간 천벌 받는 거 아니야?'
남들 다 땀 흘려 출퇴근하고 일할 때 생산에 기여 없이 놀기만 하는 사람의 쓸모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던 거 같다.
백수를 목표로 하고 퇴사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레알 백수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별 상관도 없었다.
'내가 일해온 시간이 있는데, 까짓 거 이 정도도 못 쉬어? 내게 주는 보상이렸다. 돈은 줄지만 이 정도의 행복(?) 누릴 수 있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은 불편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보상도 끝없이 받다 보면 지겨운 법이다. 특히 아무 이유 없이 시간이 남아도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점점 사람을 피해 집안에 숨어 있고만 싶고, 높은 벽을 쌓아 마음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 "너 왜 그러고 살아?"라고 툭 던지면 이 모든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버는 행위가 도덕적이고 성공적인 사회적 행동이다에 대해선 함부로 말을 못 하겠다. 단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생활을 청산하고 집에 덩그러니 남겨지자 그때서야 무수히 많은 잡념이 들기 시작했다. 잡념 중 대다수는 부정적인 성향의 것이었다.
- 놀고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인간아.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잘 좀 하자?
"네."
그. 런. 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유튜브라도 찍어서 유튜버 해볼까?'
'AI 기술이 발전 중이니 활용해서 돈 좀 벌 수 없을까?'
'알바.. 는 뭐. 됐어.'
'글.. 같은 거라도 좀 끄적여 보던가.'
'N잡이 대세라는데.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가짓수의 N은 무한한가? 0에 수렴하는가?'
세상을 만만히 바라보고, 나를 올려치기에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생각들.
'내가 해온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어?'
어떻게 안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 유튜브 보면 다들 쉽게 쉽게 돈 버는 세상 같던데. 단군 이래 지금이 가장 돈 벌기 쉬운 시절이라며?'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고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밥조차 못 먹고살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지금이 호시절이라서 밥은 먹고사는 건가?'
뭔가 깊이 없이 풍월로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았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긴 했다.
유튜브도 잠깐 기웃거려 보고, AI 기술을 활용해 자동화에도 도전해 보고 돈이 된다는 소식이 들리는 곳에 한 번씩 얼굴은 비춰봤다. 그 결과 이도저도 아닌 험한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라고 자축해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게 쓸데없는 나르시시즘은 독이 될 뿐이다.
그래도 하나 깨달은 점은 확실히 있다.
'아.. 얕은 지식으로 뭔가를 해보는 건 결국 한계에 봉착하는군.'
정말로 그랬다. 깊이감이 없다 보니 포기도 쉬웠고, 합리화는 더 편했다. 해봤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노력호소인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에 취해갈 뿐이었다.
"오빠. 알바라도 해볼래?"
"내가?"
"어. 뭐 오빠는 천룡인이야? 나는 되고 오빠는 안돼?"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 그만하자. 근데 솔직히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내의 현실감을 일깨우는 말에 취해있던 정신이 말짱해졌다.
"후우.."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한숨이 길게 뿜어대는 담배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글이라도 꾸준히 써보자.'
솔직히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건 [죄책감]에서 비롯됐다. 아무 생산도 하지 않는 입장이 되어보니 역설적으로 어떻게든 생산을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기껏해야 노트북 키보드로 몇 자 끄적여대는 나의 노동 아닌 노동과 비교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삶을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니 내가 이 정도는 해야지. 이래야 벌을 안 받아.'
벌이 두려워서인지, 무료한 삶이 지겨워져서 인지, 어찌 되었건 나를 나답게 지킬만한 최소한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 내게 있어 [글쓰기]가 현재 그런 행동이다.
보통은 글에 대한 반응이 생기기 시작해 자연스럽게 전업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반대로 아무것도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붙잡게 된 게 하필 글이라는 점이 타 작가와의 큰 차이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요즘 템플릿 중 유행하는 템플릿으로 내 심정을 한 번 변환시켜 보자면 아래와 같다.
집에서도 쩌리.
사회에서도 쩌리.
그렇다면 내 자존감을 높여줄 곳은 어디냐??
바로 [브런치 작가]다 이 말이야.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어딜 가든 나를 대접해 주는 유일한 직책.
내 마지막 자존심 자존감 자신감 그 자체
백수까지 되어버렸는데 이것까지는 뺏어가지 말아 다오.
유행하는 템플릿이라 인용해서 써봤을 뿐인데, 막상 또 쓰고 나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 스스로 디스 하는데 익숙해서 그런가 별다른 타격은 없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서.
- 어이? 너무 자기 비하가 심하구먼? 그럴 시간에 입 털지 말고 일을 하라고 이 양반아.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어.. 어쩌면 이것은 사회실험 아닌가? 나 하나를 희생시켜서 백수의 위험성을 널리 전파시켜 노동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다면 공익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를만하도다. 더욱더 열심히 시간을 낭비해 보도록 하자.'
결론은 어쨌든 지금 생활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내년 목표를 하나 정했다.
'아직 25년은 한 달 이상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내년 계획으로 미룰 생각이라니..'
좀 더 열심히 글을 써보는 것.
지금 쓰는 형태의 글과 추가로 하나의 글을 어딘가에 올려보는 것.
대충 덜 부끄럽기 위해서라도 좀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지라고 봐주시길. 여하튼 부끄러운 삶을 살 생각은 없으니 좀 더 노력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잘하는 어른이가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