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
설애의 요청으로 곽의원은 사찰로 향하고 있다. 오늘따라 날이 좀 흐리고 산속에 햇빛이 비치지 않다 보니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상당히 어두운 느낌이다.
”기분이 좋지 않군. 좀 더 빨리 가고 싶은데 길 정돈이 잘 안돼있어서 힘드네.”
으스스한 기분에 괜한 혼잣말을 한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절이 보이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 잠시 주변을 살펴보는 데 이상하게 방금 전에 지났던 길처럼 느껴졌다. 혹시 모르는 의구심 때문에 가방에서 가위를 꺼내 한쪽 나무에 표식을 남겨 본다. 다시 한참을 걸었는데 의사는 표식을 남겨 놓은 나무를 발견한다.
’큰일이다. 내가 산에 홀렸구나.’
소문으로만 들었던 산이 사람을 홀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그때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는데 뭔가에 얻어맞은 듯 그대로 정신을 잃는다.
’맘에 들지 않는 육신이지만 좀 더 강한 힘을 내기 위해 몸을 써야겠어.’
김시헌의 악령이 의사의 몸을 이용하려고 한다. 힘 없이 쓰러진 육신에 김시헌이 꾸역꾸역 의사의 영혼을 비집고 들어와 육신을 지배한다. 신내림을 받을 수 없는 몸이라 지속해서 몸을 지배할 수는 없다.
’완벽하진 않지만 중의 경계심을 없애기엔 이만한 게 없겠지.’
두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 오로지 중을 죽이고 홍심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집념만 남았다.
법주 스님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며 육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한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악귀와 부딪치면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번뇌에 빠졌다. 문득 퇴마의식 중 금단의 지식에 생각이 미쳤다.
’마지막 수를 통해서라도 내 반드시 홍심이를 지켜야 한다.’
방 정리를 마치고 난 홍심은 밖으로 나와서 서성이고 있다. 스님의 상태가 걱정되지만 수행을 방해할 수도 없다. 어느새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
’오늘 의사는 오는 것일까?’
불안하고 초조한 와중에 배고픔의 신호가 느껴진다.
’이 와중에도 밥 생각이라니. 정신 차려.’
스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홍심은 다짐했다. 그때 절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의사 선생님이 오셨구나!’
기쁜 마음에 스님이 계시는 법당으로 가 스님을 부른다.
”스님. 이제 좀 나와보셔야 할 거 같아요. 치료받으셔야죠.”
”의사가 왔다고?”
치료부터 받아야겠다 생각하며 법주 스님은 문을 열고 나왔다. 입구에서 걸어오던 의사는 천천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아직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법주 스님은 조금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걸음을 걷는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하게 걷는데 한쪽 발이 끌려오듯 했고 걷는 모습도 반듯한 느낌이 아니다.
”곽의원 이신가?”
다친 사람답지 않게 상당히 큰 목소리로 불렀다. 대답이 없다.
’혹시. 빙의? 살아 있는 인간을 이용해 공격을 피하려는 속셈이구나. 사악한 악귀 네 놈을 반드시 퇴치하겠다.’
”홍심아. 잘 들어라. 악귀가 다시 나타난 거 같구나. 이번만 물리치면 네게 신내림의 위협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구나. 법당 안에 필요할 거 같은 서책과 당부의 말을 옮겨 놓은 편지가 있을 터이니 챙겨서 도망가려무나. 어떤 소리가 들리던 이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산 정상 쪽 동굴로 피신하거라. 물론 내가 빨리 죽는다면.. 아니다. 어떻게든 널 지킬 테니 날 믿고 피신하거라. 동굴에 임시로 법당을 마련해 놓았는데 그곳은 부적과 법력이 흐르는 불상이 결계를 치고 있어 악귀도 쉽게 들어가진 못할 게다. 어서 서둘러라!”
”법주 스님! 몸도 성치 않으시잖아요. 같이 법당으로 가요.”
”좁은 공간이라 둘이 들어가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악귀와 싸우기엔 오히려 이곳이 내겐 더 편하다. 내가 더 방법을 생각해 놨으니 믿고 가려무나.”
”스님..”
”어서!”
이곳에서 자신은 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홍심은 스님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죄송합니다. 스님. 먼저 가 있겠습니다.”
홍심의 말에 대답대신 결연한 표정의 법주 스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이구나 중. 내가 다가오기도 전에 정체를 파악하다니. 이 형편없는 육신은 내 맘대로 조정이 되질 않는군. 쓸모없는 몸이지만 네놈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공격은 못할 테지.”
도망가는 홍심의 모습이 보인다.
”도망가봤자 어차피 저 년의 몸은 내 것이다. 중 널 죽이고 그 뒤엔 나의 계획대로 행할 것이다.”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법주 스님은 악귀의 말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평생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거늘. 문득 예전 피치 못하게 살생을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자꾸 떠오르는 망상을 없애기라도 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없애려고 한다.
’지금은 눈앞의 악귀만 생각하고 상대하자.’
”옴 기리기리 바아라 훔 바탁”
”또 시작인가. 네 놈이 그래봤자 별 수 있겠..”
내면의 충돌이 느껴진다. 나약하고 두려움으로 무력하기만 한 줄 알았던 영혼의 주인이 김시헌의 영혼을 밀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하지만 인간을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김시헌은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가지고 법주 스님의 앞으로 꾸역꾸역 다가간다. 다친 팔과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법주 스님은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지면 결국 홍심은 악귀의 차지가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 안쪽을 어금니로 강하게 깨문다.
”으..”
찌릿한 아픔의 감각이 돌며 피맛이 입안에 감돈다. 법주 스님은 오늘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절대 악귀를 홍심에게 보내지 않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