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신
혜리는 엄마와 언니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거란 생각 때문에 도통 잠을 잘 자기가 쉽지 않았다. 늘 수면제가 필요했고 깨어있는 날도 무기력하게 생활할 뿐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저주에서 풀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코마에 빠지던 그날도 수면제를 복용했다. 하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다. 머리만 지끈거리고 속도 메스꺼웠다. 밤새 뒤척거려도 잠이 오질 않았다. 빨리 잠들고 싶었다.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 수면제가 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갑자기 수면제를 잔뜩 먹고 나면 편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아빠한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도 고역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다량의 수면제를 먹은 상태였다.
’ 큰일 났다.’
마음속으로 느꼈을 땐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 늦어버렸어. 나도 모르게 자살 시도를 했나 봐.’
후회의 감정이 가슴속 깊이 올라온다. 우울증이 있었지만 갑자기 자살 시도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발가벗겨진 몸을 누군가 눈으로 핥는 것처럼 느껴진다. 창피함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공간에 갇혀 있었다.
”혜리야. 정신이 드니?”
”누나..”
머릿속으로 잠깐 생각을 정리한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아빠와 창훈이가 보인다. 아직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쳐다봤다. 의식이 돌아온 혜리를 보고 안심한 창민은 잠시 의사를 만나 경과를 들었다.
”아버님. 따님은 수면제 30알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한 거 같습니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부분까지는 제가 어떻게 얘기드릴 수가 없겠네요. 보통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해도 성공 확률이 높진 않습니다. 한 번에 많이 먹어서 기도가 막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다행히 그런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위세척을 통해 몸속에 있던 수면제는 거의 빼낼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건강 회복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런 얘기드려서 죄송하지만 보통 자살 시도하는 경우 다시 시도하는 경우가 많으니 꼭 심리 치료를 병행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혜리가 살았다는 안도감에 창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고 죽음의 공포는 가족에게 찾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혜리와 창훈이가 잘못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지켜야 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후우..”
깊고 거친 숨을 토해낸다.
’너무 많은 힘을 쏟았어.’
심장이 급격히 빨리 뛴다. 남의 꿈에 현신하는 건 목숨을 줄이는 일이다.
’법주 스님. 홍심이예요.’
’계속 이렇게 하면 너도 죽게돼.’
’괜찮아요. 스님도 절 살리시려고 희생하셨잖아요.’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홍심은 결국 신내림을 피하기 위해 월선의 소개로 법주 스님을 만나기로 했다. 월선과 정이는 함께 스님이 계시는 절로 향한다.
”홍심아. 언니 꼭 자주 올게. 밥 잘 먹고 스님 말씀 잘 듣고 알았지?”
단단히 토라진 홍심은 휙하니 고개를 반대로 돌린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정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당장에라도 울면서 떼를 부리고 싶어 진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이야. 어떻게든 참아내자.’
정이가 토라진 홍심의 손을 살포시 잡는다. 따스한 정이의 손길에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정이도 슬퍼질 거 같아 어떻게든 차갑게 대하려고 한다. 그런 홍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이는 가엾게 쳐다본다.
”얘들아. 절이 산속 깊이 있어서 걷는 데 많이 힘들 거란다. 오늘은 곧 해도 저물고 같으니 숙소를 구해서 잠을 청하고 내일 일찍 산을 오르자꾸나.”
”네.”
”고마워요 아주머니.”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어찌 이리 가혹한 일이.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신이다. 법주 스님이라면 반드시 홍심이를 지켜주실 수 있으시겠지.’
월선은 손을 잡고 있는 정이와 홍심을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