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익숙한 공간이다.
’다시 또 왔구나. 그 여자가 있겠지.’
주변을 돌아보는데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보이지 않자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도 아무 하고나 결혼을 할 수는 없어.’
양초가 켜져 있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엔 세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책을 펼쳐보기로 한다.
’혜선? 음.. 혜인.’
낯이 익은 이름.
’창훈이 누나 이름인가!’
천천히 일기를 읽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내용은 공간에 갇힌 본인에 대한 설명이다. 혜선 누나가 쓴 일기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홍심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쪽지 내용이 써져 있다.
’공간을 벗어나기 위한 약조가 필요했구나. 그래서 나한테 청혼을 한 거였군.’
그리고 김시헌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원한에 의해 공간이 탄생하고 창훈의 누나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난 관련이 없는데. 내가 이 공간에 오게 된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갑자기 느껴지는 숨결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웬 여자가 서있다.
”뭐야! 누구세요?”
나도 모르게 뒤로 조금씩 도망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입술만 빨갛다. 나이는 정확히 가늠이 안되지만 40대 정도로 보인다. 슬픈 표정의 여자가 앞으로 계속 걸어온다.
”가시라고요! 오지 마요.”
정체를 알 수 없어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멈출 생각이 없는지 계속 걸어오더니 결국 내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똑바로 내 눈을 쳐다보며 손을 살포시 잡는다. 따뜻한 손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 가벼운 촉감이 느껴졌다.
’쪽지?’
손을 의식하던 중 여자에게 물어보려고 쳐다본 순간 여자는 사라져 있었다.
저는 이홍심이라고 합니다. 당신을 공간으로 끌어들인 사람입니다. 이 공간에 당신도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김시헌이 이미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감시를 위한 공간이자 괴롭힐 목적으로 탄생한 곳입니다. 당신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가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어줄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연이 닿는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홍심의 쪽지를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가진 능력이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가 홍심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되뇌었다. 갑작스레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에 균열이 생기면서 추락해 버렸다.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감고 있던 눈을 떠 본다.
’다행히 죽지 않았구나. 어? 여긴.’
나루터에 와 있다. 강 건너편에는 나룻배가 보인다. 기분 나쁘게 생긴 누군가가 손짓을 하고 있다. 어떤 여자가 강을 건너가는 중이다. 배에는 다른 사람이 세 명 정도 더 있다. 모습이 다 달랐는데 한 명은 목이 기괴할 정도로 길어져 있고 다른 한 명은 창백한 피부 사이에 검붉은 상처들로 뒤덮여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배가 갈라져 있고 피가 굳은 채 장기가 말라져 있었다. 하나 같이 끔찍한 몰골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 맞은편에는 창훈이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보인다.
’창훈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창훈이는 괴로운 듯 강으로 뛰어들어 가려고 시도 중이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창훈이가 말하던 악몽이 이거였나?’
잠깐 생각하던 중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배를 쳐다봤다.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배에 있는 사람이 나를 노려본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오싹함을 느꼈다.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무언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본다. 다른 사람에게 하던 손짓의 방향이 나로 바뀌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손짓한다. 버티려고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느새 몸이 강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이대로면 큰일이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지금 사악한 자에 의해 저는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를 이 악에서 구원해 주소서.’
무슨 기도를 했는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미친 듯이 기도만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기도실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 같다.
’창훈이를 만나야 해.’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