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유채꽃이 핀다.

Episode 8. 공기는 무거워지고, 시간은 느려졌다.

by Jin

< 벚꽃이 질 즈음이면, 어김없이 유채꽃이 핀다. 흐드러진 노란 꽃밭을 걷다 보면, 그 사이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유채꽃의 노란 빛 가루가 어느새 옷자락에 달라붙었다. 손으로 몇 번을 탁탁 털어도 남아 있는 그 흔적이 나에겐 마치 어떤 기억 같았다. 잊은 줄 알았는데, 순간 탁하고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 흘러도 생각나는 그런 기억들.>




너는 술은 즐기지 않았지만, 담배는 즐겼다. 담배를 피울 때의 너는 마치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흐릿한 연기 너머, 네가 바라보던 풍경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는 끝끝내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너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그때만큼은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네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으로 가득 찼던 내 하루는 조금 느슨해졌다.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너의 방식이 좋았다.


그렇게 네 곁에 머무는 시간은, 마치 정지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너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너와 나의 사이를 천천히 부유하는 공기, 그리고 말없이 전해지는 온기. 담배를 피우는 너를 몰래 지켜보는 일은 나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너와 나의 관계를 말로 설명하려 하면 늘 모호해졌지만,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담배 연기는 금세 바람에 흩어졌지만, 집으로 돌아가 그 향이 옷에 살짝 배어 있는 것이 느껴질 때면, 너와 함께인 것 같았다.


너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담배 연기 같은 무채색이었다. 그 무채색은 내 안의 불안하고 짙은 감정들을 덮어주었다. 무너진 마음 위로 조용히 스며든 너의 담담함은 나를 계속 살아가게 했다. 신이 그러하듯 너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고, 나 역시 네가 어떤 삶을 살아가든 간섭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런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서로를 통제하지 않는 이 거리감은 무심함이 아니라 마치 너와 나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언제였더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많이 지쳐 있었다. 매일 매일이 무너질 듯한 것들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이어진 조별 작업을 마치고,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정말, 아주 잠깐. 그런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고, 눈을 떠보니 얼굴에 눈물이 얼굴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겠거니. 처음엔 다들 나를 그냥 두려 했다고. 말없이 모르는 척 지나가게 두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내가 너무 오래도록 의식 없이 울고 있어서 깨웠다고 전해주었다.


“너, 정말 괜찮아?”


라는 그 말이 나에게 닿는 순간, 왜였을까. 문득 네가 생각났다. 그래서였을까. 피지도 못하는 담배가, 그 순간에 무척이나 절실하게 필요했다. 불안정한 나를 진정시켜 줄 무언가. 그저 손에 쥐고 있기만 해도, 지금의 흔들림을 잠시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것. 놀란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듯, 자연스럽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감추지 못하는 극도의 불안감이 발끝부터 올라왔다.


“나. 담배 한 개만”


담배를 가진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야. 너 안 피잖아.”

“오늘부터 피우기로 했어. 줄 거야, 말 거야?”


한숨을 쉰 친구는 ‘두 개로 갚아라?’라는 말과 함께, 담배와 라이터를 내어주었다. 친구들은 내가 아버지를 잃은 일에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이 일을 겪은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씁쓸함을 가득 안고 나는 과 건물 휴게 공간으로 나갔다. 손끝에 담배를 올리고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불과 만난 담배 끝에서 치익.하고 타는 소리가 났다. 오랫동안 너를 지켜보며 익숙해진 모습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금방 흉내 낼 수 있었다.


무단 사용 금지


천천히,

아주 깊게 들이마셨다.

입안으로 밀려든 매캐한 연기.

폐 깊숙이 스며들며

목을 긁고

지나가는 거친 감각.

쓰디쓴, 쌉싸래한 잔향이 퍼지며

정신을 흔들었다.


마치 벚꽃이 진 자리 위에 피어있는 유채꽃밭 한가운데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 것처럼, 향이 짙었다. 어지러웠고, 알 수 없는 먹먹함이 차올랐다. 유채향 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허기진 느낌이 났다. 채워도 채워도 허전한, 쉽게 채워지지 않는. 끝이 없는 허기. 한 모금, 또 한 모금. 나는 허겁지겁 허기를 채워 넣었다. 그러자 공기는 무거워지고, 시간이 느려졌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너는, 늘 이런 감정 속에 있었던 걸까. 담배를 피운다는 건, 단순히 연기를 태우는 행위가 아니었다.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리고, 내 안에 쌓을 것은 차곡차곡 쌓는. 한 모금마다 각인되는 의식 같았다. 연기를 내뱉는 순간에는 폐 안에 남은 뜨거운 잔향이 천천히 풀려나오며 입안 가득 쓴맛이 남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때 내가 간절히 필요했던 건 담배가 아니라, 네가 나에게 달려와 주길.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길.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너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나는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라도 너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싶어서. 오랜만에 너를 만났다. 네가 담배를 피우려 할 때, 내 가방 안에 담배가 있었지만, 괜히 ‘나도 하나 줘’ 하며 너에게 손을 들이밀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너는 묵묵히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언제부터야?”


조용히 묻는 너에게, 나는 얼마 안 됐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너는 말없이 라이터도 내게 건넸다. 어쩌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신이 그러하듯. 너는 언제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너와는 내가 정말 상관없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상관없음조차 나는 고마웠다. 너는 나를 너의 기준에 맞추려 하지 않았고, 판단하지도, 내가 달라지길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너의 옆에서는 아무 수식어 없이 나 일 수 있었다. 너는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어 주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불안함을 바탕으로 한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안도감을 밑바탕으로 한 불안감이었을까.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감정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서 공존했다. 나는 그런 네가, 어찌할 수 없이. 미친 듯이 좋았다.


그 좋음이란 게 우습게도 나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서 좋았고, 나를 파고들지 않아서 좋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내 안의 우울함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너의 담담한 말투와 간결한 말은 나의 상처를 건들지 않았다. 그것이 너의 배려였음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겨우 잠이 드는 날이면, 울면서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말했다.


“누나, 어제 나랑 대화한 거 기억나?”

“아니?”


또 어떤 날은.


“누나, 자다가 뭐 한 거야?”

“내가 뭐 했는데?”


수면보행장애가 찾아왔다. 깊은 밤,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일. 다리를 보니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밤마다. 내 몸은 나 몰래 울고 있었던 걸까. 나는 조금씩 피폐해졌고, 점점 더 예민해졌다. 누군가 그러더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누가 그래.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아르바이트와 학업으로 바쁜 하루 틈 사이에서도 나는 자꾸만 너를 떠올렸다. 너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너의‘괜찮아’라는 그 한마디를 수도 없이 곱씹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너의 흔적을 나는 부지런히 좇았다. 탁탁 털어도 옷에 남는 노란 유채꽃가루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고, 한 번 스치면 끝끝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잔향 같은 너의 흔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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