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9. 이건 내 업보다. 업보.
<봄이 저물어 갈 때쯤, 겹벚꽃이 핀다. 탐스럽게 내려앉은 분홍빛 꽃잎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겹벚꽃이 예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벚꽃을 흉내 내는 것 같아서. 겹벚꽃은 어쩐지 늦게 찾아온 계절의 미련처럼 보였다.>
“좋아해.”
과방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던 어느 날,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돌리자, 마주한 시선이 선명했다. 담담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쯤은 학기 초부터 알고 있었다. 나에게 시선이 자주 머물렀고, 말 없는 배려가 따라다녔다. 다만 모른 척했을 뿐. 나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저, 바빠요.”
“알고 있어.”
“저, 성격 안 좋아요.”
“알고 있어.”
“선배. 저 담배도 펴요.”
“알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충분히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지만, 선배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나 하나로도 벅찼기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저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내 거절의 의사는 분명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선배에게 여지를 줬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그것만 극복하면 너무 괜찮을 것 같고, 잊지 못하는 사람을 잊게 하면 될 것 같았겠지. 내가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그걸 잊었다. 바보처럼. 그냥 선배에게 싫어요.라는 한마디면 되었을 텐데. 나는 왜 그랬을까. 내 말에 선배와 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선배는 가만히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나는 괜찮아.”
하. 괜찮다고? 무엇이?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 자신을 위로하는 ‘괜찮아는 괜찮았다. 하지만, 선배가 말하는 ‘괜찮아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지금에서야 알겠다. 그건 아마도 나를 닮아있던 선배가 본능적으로 못 견디게 느껴졌기 때문이란 걸. 그때 선배의‘괜찮아’라는 말은 마치 나를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이 뒤집혔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몇 마디나 나눠봤다고, 내가 좋아요? 나 알아요?”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다. 피로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고, 짜증은 한계까지 차올라 있었다. 결국 선배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선배는 자꾸 내 시야에 걸리적거렸다. 그렇다고 딱히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항상 일정한 거리에서 내 주변을 맴돌았다.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떤 감정이었길래?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나를 곁에 내버려 둔 걸까.
선배를 바라볼 때마다,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네 기분을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던 나. 네가 불편해할까 괜히 거리를 두고 있던 나. 그런데 지금, 그 모습을 선배에게서 보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환장하겠네. 어쩌면, 넘칠 듯한 내 감정을 너에게 던져놓고는 받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팽개쳤던 순간들. 그때의 내가, 매 순간 너에게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지금 고스란히 곱절로 되돌려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선배와 나의 상황은 너와 나의 상황과는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비슷했고, 같은 결의 감정이었다. 선배는 마치 그때의 나처럼,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향해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상대해 주지 않는다면 곧 포기하겠지 싶었다.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이상 마주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평소엔 스치듯 인사만 하던 선배는, 내가 휴게 공간에서 담배를 피울 때 시간이 맞을 때면 어김없이 나에게로 왔다.
“담배를 왜 피워?”
“그냥요.”
“담배, 몸에 안 좋아.”
“알아요.”
선배는 과 남자 선배 중에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잔소리하려면 그냥 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배는 ‘아냐. 펴. 계속해.’라며 나와 한 뼘 거리에서 나를 바라봤던 것 같다. 그때 내 기억 속의 선배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리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그 순간, 문득 내가 이랬나…? 싶기도 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가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각인하듯, 그날 나는 너에게 그렇게 각인된 듯 따랐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허우적거리면서. 네 앞에서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네 기분을 맞추고 싶어 늘 조심스러웠다. 네 표정을 살피고, 네 말투를 가늠하고, 사소한 단어 속에서 의미를 짚어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어이 알아내려 애썼다. 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노력을 바라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나는 네가 허락해야 곁에 있을 수 있었고, 네가 밀어내면 나는 언제든 너 없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질 수밖에 없는. 이 관계의 주도권은 항상 너에게 있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선배에게 각인된 걸까. 움츠린 어깨, 나를 향한 시선, 작아진 숨소리.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 너무 익숙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온종일 너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내가 있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내 옆에 선 선배에게 짜증을 낼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보다는. 이 상황이 그저 마음에 얹혔다. 체한 것처럼, 속이 꽉 막힌 채로 답답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까도 싶었지만,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치익. 소리를 내며 유채꽃향 담배가 타들어 갔다. 선배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담배를 필 때만 내 옆에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네 곁에서 힘들었던 내가, 선배에게서 보여서. 선배를 배려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나를 위로하는 행동이었다. 너도, 이런 마음으로 내 곁에 있었던 걸까.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나에게 너의 옆을 내어주었던 그 시간. 그것이 너의 배려였는지, 그저 너의 방식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착하기만 한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내 마음 좀 알아달라며 너에게 매달리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마음을 감당해야 했다. 지금 이 관계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이게 업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업보일까. 내 업보다. 업보. 선배는 시간이 날 때면 나를 찾아왔다. 선배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선배는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다. 또 다른 날. 선배는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슬쩍 차지했다. 한참을 내 옆에서 머물렀고, 나는 딱히 말을 건넬 마음도 없었다. 선배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습관처럼 늘 그랬듯, 같은 질문을 했다.
“힘들어서 펴?”
“아니요.”
“담배를 피우면 어떤 느낌인데?”
그 질문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거였다. 맞은편 건물의 창문 개수만큼이나 반복된 말이었다. 보통은 대충 웃어넘기거나, ‘그냥요’ 같은 말로 얼버무렸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조금 솔직해지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걸까.
“음-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느낌?”
전에 없던 표정으로 선배에게 장난스럽게 말하며,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어 보였다. ‘그리고 사라지고 싶은 느낌이요.’라는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줄곧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괜찮은 사람인 척. 그렇게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나를 지탱하기조차 벅찼고,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만큼 위태로웠다.
삶은 그저 고된 하루의 반복이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성적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은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의 학부모 상담에도 다녀와야 할 만큼 그 당시 나도 분명 어렸지만, 어리다는 말로는 핑계를 댈 수 없을 만큼 어른이 되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고,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껴안은 채로. 버티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 시절, 내 무게를 함께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선배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말없이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딘가 깊이 상처 입은 듯한 눈빛, 얼어붙은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괜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상하게도, 속이 울컥거렸다.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슬퍼졌을 것 같아서.
안녕하세요, Jin입니다.
생각보다 어둡고 긴 터널 같았던 제 시간들을 글로 풀어내며, 이 무게가 독자분들께 너무 힘겹게 다가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초보 작가는 이번 연재를 통해 다시금 배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에 공감해 주시고, 응원과 따뜻한 말씀을 건네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마음 덕분에 글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