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1.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손철주
아무리 버텨도. 가지에 붙은 꽃잎들이 끝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질 텐데.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겹벚꽃들이 부는 바람에 몸을 나부낀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처절하다고 해야 할지. 결국 비에 젖어 바닥으로 꽃잎들이 하나둘 무겁게 내려앉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물에 젖어 눅진해진 길 위로 분홍빛 조각들이 끝없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밟으며 지나갔다. 비에 젖어 사람들에게 짓이겨져 사라져 가는 그 모습이 마치 어떤 마음 같아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선배에게 마음이 쌓여가는 것이 보인다. 마음을 주면, 언젠가는 받고 싶어지는 것. 그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선배는 나에게 계속 Input만 할 순 없었고, 나는 선배가 원하는 그 마음을 Output 해 줄 수 없었다. 그날도 운동장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낮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차 있던 운동장. 하지만 늦은 오후가 되면, 이곳은 텅 비고 조용했다. 도망치듯 숨을 곳이 필요할 때, 나는 종종 이 운동장에 나와 앉았다. 하루의 끝에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이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익숙하게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연기에 실려 사라지기 전, 내 마음을 무심하게 선배에게 툭하고 던졌다. 왜 안되냐는 그런 말을 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다.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네가 했던 말을 이제 내가 꺼낸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내 말 한마디로. 선배와 나의 시간이 끝났다. 마치 겹벚꽃이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것처럼. 나는 관계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게 무엇인지 절실히 도 경험했다. 나는 선배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었고, 이쯤에서 내가 끊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너 역시 그랬겠지. 커지는 내 마음을 네가 감당하기에 버거웠겠지. 이제 조금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선배는 내게서 별말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더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애써 모른 척했지만, 알고 있었다. 내가 너를 바라봤던 것처럼, 선배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다가오지 않을 뿐. 내가 싫다고 했으니까.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말없는 배려는 덤이었다. 그랬다 선배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선배와 나의 차이는 하늘과 땅 같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선배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착한 얼굴을 한 선배가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그건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선배와 나 사이에 담배 연기가 내 앞에서 부유하다가, 이내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선배는 이제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못한 채, 봄이 되지 못한 겨울처럼, 여름이 되지 못한 봄처럼, 가을이 되지 못한 여름처럼 흐릿하게 어딘가에 떠밀리듯 살아가던 나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나의 상처가 또 다른 나를 만들었다.
물고 물리는 감정의 대물림.
끝없이 반복되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였다.
봄과 여름의 경계, 그 모호한 순간에 세찬 비가 내린다. 계절이 넘어가는 그 짧은 틈 사이에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겹벚꽃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형체를 잃어가는 꽃잎처럼, 마음도 흩어졌다.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는 거리.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이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 어쩌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다 알고 있음에도, 다시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건, 결국 이런 거였다. 내가 후회한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결말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몇몇 사람을 더 만났다. 나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관계는 결국 피로함만 남겼다. 나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너의 흔적이었을까. 나의 흔적이었을까. 그들의 애정 어린 말도, 따뜻한 손길도, 나에게 내밀어진 관심도 끝내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찾는 어떤 것들은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벅차고, 고단했다. 삶은 위태롭게 통째로 흔들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나는 지쳤고, 슬퍼졌다.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영원한 것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물러났다. 연락을 받지 않고, 약속을 만들지 않고, 관계라는 것들에서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손철주는 『꽃이 피는 삶에 홀리다』에서 말했다.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은 또 살아야 하니까. 삶을 견디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뭐든 빨리 배우고 쉽게 소화하는 사람이었다. 전공서적, 심리학, 사진학, 고전문학, 산문집, 만화책, 에세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수많은 책들의 글과 문장 속에서, 나는 삶을 견디는 법을 익혀갔다. 홀로 있는 시간이 유일한 안식이었고, 침묵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이분법으로 존재하던 내 세상을 잘게 쪼갰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삶을 바라보고 싶었다. 단순한 흑백이 아니라, 더 다양한 색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 앞에 앉아 색을 고르고, 붓을 움직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와 캔버스, 그리고 물감만 존재했다.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그릴수록 마음이 고요해졌다.
감정이 휘몰아칠 땐, 카메라를 손에 쥐고 산과 강, 바다, 길을 걸었다. 풍경을 담으며, 빛을 쫓으며 카메라 안에 내 감정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떤 날은 봄처럼 설레고, 어떤 날은 여름처럼 벅찼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꽃잎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Jin 입니다. 글을 읽고 공감과 응원을 해주셔서 너무 힘이 납니다. 지금 Episode25. 작업 중에 있습니다. 모든 에피소드가 소진되기 전엔 완결을 쓸 수 있겠지 싶어서 월 / 수 / 금으로 연재일을 변경하였습니다. 앞에 너라는 인물과 선배라는 인물은 과거고 끝난 감정이라 글 쓰는 것이 담백하다면 할 수 있지만 뒤로 갈수록 질척거리는 저를 마.. 만나고 있습니다. 이걸 어디까지 써야 할까 고민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해봐야 아는 거니까요. 세상의 모든 작가님들이 느끼는 고뇌와 노고가 새삼 깊이 와닿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