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이쯤 되면, 인과응보인가.
<봄의 끝자락에 뒤늦게 핀. 어딘가 어색하게 자리 잡은 꽃. 그래서인지 내겐 겹벚꽃이 그저 봄의 끝자락에 스쳐 가는 꽃일 뿐이었다. 길가에 가득 핀 걸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비에 곧 떨어질 운명을 떠올렸다. 피어나는 순간부터 이별을 예감해야 하는 꽃.>
“한 번만 만나보자. 딱 한 번만.”
그날 이후, 선배는 다시 결심한 듯 내 앞에 섰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했다. 전에 없던 단호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선을 그어도, 거절해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면서도 선배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차라리 한 번 만나 주는 게 나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만나보면 나라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포기하겠지 싶었다. 피차 사람의 마음이란 건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보면 더는 나를 붙잡지 않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배의 모습에서 자꾸만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너도 그때 이런 마음이었나. 내가 아무리 조바심을 내고, 어떻게든 네 마음을 돌려보려 해도 네가 나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던 이유가. 그냥 두면 너를 스스로 포기할 것이라. 생각해서였을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나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려 웃었던 것 같다.
내 감정을 숨기고 싶었던 건지,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는지, 체념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정말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표정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말하지 않는 나를 선배는 가만히 바라봤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를 기다렸다. 선배와 나 사이에 서로 다른 방향의 애매한 감정이 흘렀다. 너와 나의 역할이 바뀐 것만 같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이 관계를 시작해도 되는 걸까.
“그래요, 그럼 만나봐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가지 않으면 그냥 끝이에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내가 선배에게 만나보자고 했던 건, 어쩌면 이 관계를 통해 너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다. 그때 너는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네가 될 수 없었고, 선배는 내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이 과정을 겪는다고 해서 그때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누구를 이해하고 싶었던 걸까? 너? 아니면 나?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이것조차 결국 나를 위한 마음이었다. 끝까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나였다. 선배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 걸까.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날의 나처럼. 잊지 못한다는 건, 누구와도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뜻인 데. 선배는 이 관계의 끝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손잡아도 돼?”
손 그까짓게 뭐라고. 그냥 잡으면 되지, 뭐 이렇게까지 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선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까지 놀랄 일이야?
“네. 만나보자면서요.”
선배는 손을 바지에 닦더니 내 손을 잡았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촌스럽게. 손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내가 아프지 않을 만큼의 힘으로 꾸욱 나를 붙잡았다. 선배의 손은 너와 달랐다. 크고 약간은 투박했다. 나와 만나는 동안 선배는 나를 애지중지하며 이서야, 이서야 늘 다정하게 불렀다. 그 목소리마저 너보다 높네, 낮네, 너의 손은 항상 보송보송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너와 비교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선배는 항상 내 손을 잡기 전에 물어봤다. 나와 선배의 다른 점이라면 이런 거였다. 마치 내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나는 왜 너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선배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늘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선배와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선배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선배 앞에서 굳이 점잖게 행동할 이유도 없었고, 이 관계가 끝나더라도 큰 타격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배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냥,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그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불편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선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내가 떠올랐다. 네 앞에서, 나도 저렇게 앉아 있었을까. 아무 말 없이, 네가 날 봐주기만을 바라면서.
내가 선배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나를 원망했으면 했다. 내가 너를 원망할 수 없는 것처럼, 선배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선배도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우직할 정도로 묵묵히 곁을 지켰고,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나를 지켜봤다. 그런 선배에게 나는 계속해서 선을 그었다. 딱 여기까지만. 더 다가오면, 선배에게 생채기가 날 것 같았다. 선배는 나였기에, 선배에게 상처가 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더 아플 것 같아서. 선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곤 했다. 그 말들이 어쩐지 고마웠고, 가끔은 미안하기도 했다. 너에게 바랐던 것 중 일부를 선배에게서 받았다. 하지만 그게 선배였기 때문에, 나는 선배가 주는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너 역시, 내가 너에게 줬던 마음들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을까. ‘나’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스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흐린 하늘 아래, 담배 연기만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말없이 피어오르다 이내 흩어지는 그 연기처럼. 너와 나, 그리고 선배와 나 사이에도 침묵만이 맴돌았다. 봄이라기엔 더웠고, 여름이라기엔 어중간한 날씨. 계절의 틈새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아직 다 지지 않은 겹벚꽃처럼, 선배는 나에게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선배도,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선배는 나를 자주 찾았다.
마치 내가 사라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선배는 조용히 나를 둘러쌌다. 그런 선배를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 감정들로 얽혀 있는지 문득 생각하게 됐다.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가, 이내 나의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귀퉁이에서 어머니의 손을,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사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죽은 게 네가 아니라 다행이다.’
외할아버지 자신의 아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그 말은 이상하게도 따뜻했고, 이상하게도 잔인했다. 마음이란 때때로 그렇게, 이기적인 안도감과 뒤섞여 있었다. 그 모든 기억과 마음이 담배 연기에 담겨 아른거리다 날아갔다. 생각이 끝난 나는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며, 선배를 바라봤다.
“ 가요. 선배는 안 바빠요?”
“...”
또 그 표정이다. 일그러진 선배의 얼굴. 마치 자신이 나보다 몇 곱절은 상처받은 사람처럼. 쓸데없이. 나는 빠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선배는 이래서 나에게 안 되는 거예요.’라는 말이 목에서 자꾸만 비집고 나가려 했다. 선배는 마치 겹겹이 핀 벚꽃처럼, 다정함을 몇 겹씩 쌓아 나를 감싸려 했다. 겹벚꽃의 꽃잎은 두꺼웠다. 두터웠기에 오래 버틸 수 있다. 쉽게 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선배의 그 마음이, 그 다정함이, 버거웠다. 나도 너에게 어쩌면, 겹벚꽃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너도 내 마음이 이렇게 버거웠겠구나. 외면하고 싶었다. 그게 선배인지, 나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Input은 있는데, Output은 없다. 선배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자꾸만 집어넣기만 했다. 마치 마지막까지 가지를 놓지 않는 겹벚꽃처럼.
그래서 선배에게 차갑게 대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다정했어도 되었을 텐데. 내가 너의 다정함에 위안받고, 혼자 기대하다가, 스스로 상처받은 내가 아파서. 나는 선배에게 다정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선배가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그 기대를 감당할 수 없을까 봐, 겁이 났다. 선배는 내가 아닌데. 나와는 다른 사람인데. 그게 아닐 수도 있는데. 선배는, 내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인과응보인가.
나는 얼음이 잔뜩 담긴 컵을 마구 휘저으며 선배에게 물었다. ‘내가 왜 좋아요?’ 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냥이 어딨어요. 그냥이라는 답 싫어해요.’라고 말하자. ‘정말 이유가 없는데, 귀여워서라고 해두자.’라고 했다. ‘전 그렇게 귀여운 포지션이 아닌데요.’라고 내가 말하자. 이번엔 선배가 입을 다물었다. 컵 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선배와 나의 틈을 메웠다.
너는 왜 나를 옆에 두었을까.
나는 왜 너의 옆에 있었을까.
나는 왜 선배를 내 옆에 두었을까.
선배는 왜 내 옆에 있었을까.
서로의 관계가 꼬리처럼 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