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는 시작점에 등나무꽃이 핀다.

Episode 12. 내가 피워낸 이 꽃들은 누구의 것일까.

by Jin

스스로 서지 못하는 등나무는 어디든 기댈 곳이 있다면, 부드럽지만 강하게 감아 오른다. 단단한 기둥을 타고, 담장을 넘어 제 갈 길을 찾는다.




봄이 끝나는 걸까, 여름이 시작되는 걸까. 그런 애매한 경계에 늘 만나던 곳에서 너를 만났다. 커피를 시켜두고, 너와 나는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았다. 너는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는 너의 애매한 날씨 같았다.


"여전히 담배 피워?"

"응"


너의 말에 나는 증명이라도 하듯,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날따라 미묘한 공기가 너와 나 사이를 가득 메웠다. 너와 나의 사이는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부어도 메워지지 않는 깊고 깊은 틈 같았다. 얼마나 더 쏟아 부어야 그 틈이 메워질까. 언제쯤이면 그 메워진 그 틈을 밟고 온전히 나는 너를 안아볼 수 있을까? 너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손을 뻗어 잡을 수 없었고, 자꾸만 더 깊고 어두운 틈이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무슨 책 읽어?”


그 틈에 말이라도 쏟아 넣으면 좀 메워질까 싶어. 나는 아무렇게나 물었다. 네 가방엔 늘 책이 들어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책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너의 책들은, 언제나 너를 닮아 있었다. 나는 네가 건네준 책을 펼쳐, 네가 읽던 페이지를 손끝으로 더듬듯,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눌러가며 천천히 글자를 짚어 읽었다.


어색한 공기를 누르려고.


내가 책을 읽는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너와 나는 미묘하게 조금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그날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는 설렘이 아닌, 오래된 짐처럼 가슴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왜 이토록 무거운 걸까? 내 안의 감정들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너와 마주 앉아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걸 떠올렸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삶을 견디기 위해 내가 붙잡았던 것들. 살아내기 위해 손에 움켜쥐고 있던 조각들. 그 조각 하나하나가 결국 너였다.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찾았던 도피처들이 결국 너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 생각에 미치자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네가 그걸 알아차릴까봐. 네가 불편해할까 봐. 그래서 결국 너를 만나지 못 할까 두려웠다.


너는 책을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음악에도 사람도, 옷도 모든 것에 취향이 분명했다. 담배를 피웠지만, 술은 좋아하지 않았다. 낮고 차근차근한 말투로 불필요한 수식어 없이 설명이 가능한 단어를 골라 문장을 만들었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감정을 숨길 때면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고, 정말 웃을 땐 입술에 힘을 주고 일자로 웃었다. 말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넘기는 사소한 것들조차 너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금세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 능력은 나도 모르게, 너의 습관들을 내 안에 들이는 데 쓰였다. 담배를 피우는 손끝, 책장을 넘기는 손의 리듬, 시선의 흐름, 그림을 그릴 때의 자세, 말투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내 모습 중 7할쯤은 너였다. 흡사 거울을 들여다보듯, 너를 바라보며 나를 만들어갔다.


너를 잊으려 애썼던 모든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천천히 글자를 짚어 읽듯. 오히려 너를 더 선명하게 내게 각인처럼 새겼었구나. 아.. 하고, 별안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크게 들이 쉰 숨은 네가 눈치 챌 수 없게 담배 연기에 실어 내 보냈다. 잊으려 했던 순간. 너를 잊고 싶지 않았던 순간. 두 감정 사이 어딘가를 오래 맴돌았다. 삶을 견디기 위해 내가 스스로 찾아낸 길이라 믿었던 것들이. 알고 보니 너의 흔적 위에 놓인 길이었다. 기특하다는 듯 혼자서 부지런히 걸어가던 내 모습이 떠올라 우스워졌다.


어쩐지, 이정표가 곳곳에 있더라니.


나는 너처럼 담담하게 세상을 견디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쉽게 휘청이지 않고, 불필요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말보다는 태도로, 감정보다는 이해로 나아가는 사람. 너를 닮으면, 내가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나에게 없었던 것들 그 모든 결핍의 끝에서 너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빈틈을 너로 채우고 싶었던 걸까. 그건 어쩌면 너를 향한 동경이자, 나 자신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시간 속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가 있었을 뿐. 이 상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어려웠다.




Photo by Jin


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꾸만 눈물이 났다.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는 나. 누군가의 단단한 기둥을 타고 올라가야만 하늘을 향해 뻗을 수 있는 나. 나는 마치 여름의 시작점에 선 등나무처럼 느껴졌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서러웠고, 슬펐으며, 좌절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렇다면 그 등나무를 키워낸 것은 너인걸까. 아니면 나인걸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물론, 너라는 기둥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위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몰랐고, 어디로 가지를 뻗어야 할지도 몰라 끝없이 헤매고 있었겠지. 너라는 기둥을 따라 오르며, 네가 가르쳐 준 것들, 네가 남긴 흔적들. 처음에는 분명 너를 따라 한 것뿐이었지만, 너와는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바람과 햇살 속에서 나는 나만의 가지를 뻗기 시작한건 아니였을까. 햇빛이 강하면 강한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견디며, 비가 내리면 물기를 천천히 머금으며 조금씩 자라 스스로를 지탱하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름의 초입에 보랏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등나무꽃의 그 화려함은 과연 온전히 등나무의 것인가? 이 꽃들은 누구의 것일까? 등나무를 받쳐 준 기둥의 것일까, 아니면 온전히 등나무의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단단한 너라는 기둥에 매달려 만 있었다면, 나는 결국 자라지 못했을거란 사실이다. 기둥은 등나무를 지탱할 수는 있어도, 꽃을 대신 피워 줄 수는 없으니까.


그 사실에 도달하자, 나는 우는 것을 멈췄다. 볼품 없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처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그 애매한 계절 틈새에 보랏빛 꽃송이들은 무리를 지어 피어나 햇살 아래 은은한 향기를 흩뿌릴 만큼 내가 스스로를 나를 키워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꽃을 피워내는 것은 오롯이 등나무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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