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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Mar 09. 2024

에필로그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 고모랑 동거하기


그러고 보니 이 브런치북에 '프롤로그'가 없었어요.

'에필로그'라도 써 보기로 했어요.

초고를 쓰기 시작했는데 자꾸 장황해지는 거예요.

변명 같은 글, 하소연 같은 글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초고만 1만 자 넘게 썼을 거예요.

대미를 근사하게 장식하고 싶다는 집착이 버려지지 않았어요.

간략하게 쓰되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란 걸 깨달았어요.


연재해 본 분들은 요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아실 거예요.

못 지켰을 때는 더 큰 스트레스란 것도요.

어제가 연재 요일인데 오늘에야 이 글을 발행합니다.

저는 왜 요일을 어기면서까지 발행하는 걸 미루었을까요.


순이 고모가 농사 짓는 이야기를 해 드리면요.

"고모, 밭에 가서 양파 어떻게 자라는지 안 보셔도 돼요?"

"냅도 부러. 때가 다 있당께."

아~~고모, 그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예요?

나이 오십이 넘은 제가 때를 몰라요.


명상을 몇 년 해 본 자로서 브런치에 임해 온 저의 자세를 가만 생각해 봅니다.

욕심을 버려야 ''가 보인다는 걸 잊었어요.

깨다음을 핑계 삼아 '멋진 에필로그'를 올리겠다는 집착을 접었습니다.    

덕분에 하루 늦은 연재로 오늘 드디어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 에필로그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쓴 초고는 서랍 깊숙이에 넣어 두고, '시골살이', '무안살이'가 내 삶에 어떤 역할을 하였나, 목표한 바에 닿았나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명료하게 살펴보았어요.


순기능

1. 순이 고모와 친분을 쌓았다. (고모는 너무 멋진 분^^)

2. 시골에서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고모가 하시는 알바 따위)

3. 시골살이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무안이 아니라도 괜찮다)

4. 브런치 구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내 기준으로, 무척 감사하게도.)

5. 첫 브런치북이었던 만큼 새로운 테마(<하이볼을 마시는 단편소설의 밤>, <지금이 젤로 젊다GOGO>)를 도모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6. 전남 무안에 대한 관심을 소소하나마 일으켰다. (수십 혹은 수 백 명이 무안? 하고 시들어가는 지역 이름을 불러주니까)

7. 순이 고모의 팬들이 많이 생긴 만큼 후광 효과로 나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강화도 정수사에서.


역기능

1. 순이 고모 뒷집에 사시는 큰고모를 뵙는 게 힘들어졌다. (두 분 사이가 안 좋으셔서 눈치 보느라 힘들었다. 언젠가 쓸 이야기.)

2. 순이 고모께 정직하고 솔직하지 못했다, 순이 고모를 이용대상으로만 보았다는 죄책감이 생겼다.

3. 시골살이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성급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

4. 지난가을 이사 온 이 아파트에 솟아나던 애정이 식었다. (무안과 비교되어 빌딩숲의 갑갑함, 층간소음, 이웃끼리 껄끄러움 등)

5. 도시에서 살기 싫어졌다. 

6. 현재,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7. 브런치 구독자 수의 오르내림에 집착한다.(수가 줄 경우 지나친 자기 검열을 한다)

8. 다른 테마의 브런치북 연재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이 브런치북 같은 성취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해선 타고 보이는 한강.


무안 시골살이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네! 수많은 역기능이 있음에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시골살이는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내면에 얼어있는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질을 한 셈이었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 가슴과 머리가 온통 뒤집어졌거든요.

무안살이하고 와서 저는 혹독한 무안앓이 중이랍니다.


날마다 무안의 들판과 하늘, 바다, 별, 미남이와 쨍이 들을 그립니다. 

그런 만큼 안산을 떠날 생각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 여기'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드니 매우 매우 역기능인 것 같습니다.

장기간 시골살이를 선택하더라도 준비 기간 몇 달은 필요할 테고, 그전까지 여기에서 행복해야 하는 거잖아요. 비교는 불행을 불러온다는 진리를 잊었어요.


날마다 순이 고모를 생각합니다. (글 쓰는 지금도 뜻 모를 눈물이...)

고모의 라이프 스타일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 행동이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요.

아르바이트한다고 거짓으로 둘러댄 일이 찔려요.

무구한 고모와 있으면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고모가 그리워요.


아직도 못다 한 무안 이야기 더 있어요.

그건 다른 에세이로 들려드리려고 해요.

시골살이 매일 글쓰기 하듯 하지 뭐, 하고 시작했다가 독자님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커서 욕심이 과해졌지만, 매회 연재하면서 저의 사유도 조금은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요.^^


이 연재에 관심 가져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모든 날이 행복과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정수사에서 본 상고대. 봄이 올 것 같은 날씨라 반가우면서도 함께했던 겨울에게 인사하고 싶네요. 제 인생에서 이번 겨울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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