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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Mar 05. 2024

여그가 너 집이제.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 고모랑 동거하기


오늘 아침에 고모께 전화를 드렸다.

"고모, 제가 안산에 예정보다 빠르게 올라오느라 무안 놀러 오기로 한 친구 네 명 방문이 취소됐잖아요. 그 친구 중 한 명이 무안 꼭 여행하고 싶다는데, 다음에 저 갈 때 함께 가도 돼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되제. 여그가 남 집이냐? 너 집이제.

 

어떻게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말씀할 수가 있을까.

솔직히 무안이 내 집인가? 내 부모님 집인가?

작년까지만 해도 고모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사이였데, 고모가 '네 집'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무구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고모는 나쁜 사람한테 사기당해 보질 않으셨나? 고모의 자녀들이 사촌한테 엄마가 그리 말씀하는 걸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강화도 정수사. 수많은 사진 중 이 사진을 넣고 싶은 건 기와 위에 얹어진 눈의 감성 때문이다. 


오늘(3월 4일) 전화를 드린 까닭은 '순이 고모 생일'이 카톡에 떴기 때문이었다.  

용돈을 부쳐 드릴까? 계좌를 여쭈면 답을 안 하실 게 분명한데. 

선물을 보내드릴까? 고모 댁엔 여기저기서 온 물건들로 차고 넘친다. 버려지거나 누구에게 주는 것들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하다가 오늘이 되고 말았다.


고모가 우렁찬 목소리로 반기셨다. 

"창창이 잘 지냈냐?"

'아, 왜 그렇게 뭉클하게 받으세요?'(고모를 떠나온 마음에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오전 알바를 하실 시간인 줄 알았더니 양파 밭에 가 계신다고 했다.

"날이 따셔졌으니 약을 쳐야 혀."

"그럼 요 며칠 바쁘신 거예요?"

"암만."


양파밭


양파 거두는 5월, 씨앗 심는 10월 딱 두 달만 바쁘다고 하시더니. 그 말을 난 순진하게 믿었다. 그래서 맨날 게이트볼 가서 노시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농사일인데 단 두 달만 바쁘면 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나란 사람은 무엇이란 말이냐.

한심한 나 때문에 혼자 웃으며 고모의 목소리를 더 듣는다. 일을 하시니 기운 차 보이는 목소리. 

"알바는 아직 안 끝났냐? 언제 오냐?"

마치 '집으로 돌아올 식구'에게 묻듯이.


1월 말에 알바가 생겼다고 서둘러 안산으로 올라온 나는 내내 죄책감을 느끼고 지냈다.

고모는 내가 알바가 끝나면 무안으로 가 몇 달이고 머무를 것이라 믿고 계시다. 무안을 떠나기 전날 얼버무린 탓에 약속처럼 되어 버린 듯하다.


나는 좀 더 일해 봐야 알겠다고 둘러댔다. 얼른 화제를 바꿨다.

"고모. 오늘이 고모 생신이세요?"

"아니. 나 생일은 한참 뒤여."

대답을 피하셨다. 당신 생일을 챙기기 바라셨다면 바로 며칠이라고 했을 텐데. 두 번 더 여쭈어 알아낸 날짜가 음력 3월 14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내가 챙길 사람이 하나 늘었다. 무슨 선물이 좋을까. 통화 목소리로 봐선 창창이 가는 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3월 중순 미리 생신 기념할 겸 일주일이라도 무안으로 달려갈까?'



보라카이 여행 다녀온 친구가 준 비누 선물. 향기가 좋아서 이대로 컴 옆에 두고 있다. 




"왜 무안을 돌연 떠나게 된 거야?"

안산에서 만난 친구들이 물었다. 한 마디로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상황이 중첩돼 있기 때문이었다.

안산에 올라온 이후의 글에서 어느 정도 표현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는 한 친구의 또렷한 질문처럼 무안 시골살이 중 뒤의 1주일이 빠져 있어 그렇게 느낄 만하다.


연재를 60% 진행한 상태에서 일정을 앞당 올라온 탓에 글이 죄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순행적 구성이던 시골살이가 어느 순간 역순행적 구성이 되었으니 맥락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나 스스로 그걸 아니까 2월 내내 두 가지 감정으로 홍역을 앓는 중이다. 

무안과 고모, 고요함과 단순함에 대한 그리움이 첫 번째요. 

그곳을 떠나온 이유를 고모 당신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 두 번째다.

본업을 그만 둔 결정부터 모조리 소환해 자긍심을 바닥으로 자꾸 끌고가고 있는 나. 

그 시작은 무안살이를 제대로 아퀴(끝매듭) 짓지 못한 꺼림칙함에서 싹튼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이번 금요일에 이 브런치북의 마지막 연재를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시골서 한 달, 살아볼랑가?>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턴 화요일 연재가 사라질 생각을 하니... 약간의 공황상태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우리의 화요일은 그래도 의미롭다! 외쳐봅니다.


다음 브런치북은 <지금이 젤로 젊다GOGO>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생각이에요.

제 마음에 닿은 여행지와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랍니다. 

신나게, 솔직하게, 재미지게, 때론 따숩게 써 볼 게요.^^



https://brunch.co.kr/brunchbook/unfamiliar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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