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창한 날들 Mar 01. 2024

희망은 저녁놀

무안 시골살이 적응기 - 고모랑 동거하기


지금은 저녁 여덟 시다.

고모가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다. 나는 내 방에서 브런치 글을 읽고 있거나 종이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미리 보냉병에 넣어둔 얼음을 넣어 하이볼을 한 잔 마시면서.


오늘 오후에 혼자 영화를 보았다. 

집을 향해 걷다가 고모 생각이 났다. 오후 6시가 막 지났으니 저녁을 드시고 계실 것이다. 오늘따라 바람이 차고 거세게 불고 을씨년스러워서 쌀국숫집으로 냉큼 들어갔다. 따습게 국물까지 죽 마시고 나니 전화 시각을 놓치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5분 전. 드라마를 보시려고 각 잡고 앉아 계실 시각이라 전화는 내일로 미룬다. 드라마 끝나면 주무실 준비를 하시기 때문이다.

 

몇 달 전만 해도 고모는 내 삶의 어디에도 없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안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는 내 하루가 고모의 하루와 나란히 흐르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게이트볼장에 계시겠네, 저녁 드시겠네. 저녁 먹을 때마다 고모는 "창창 너가 와 있어서 밥이 겁나게 맛있다야." 하시며 얼마나 달게 드셨나 모른다.

고모의 하루는 단순하다.


순이 고모의 하루
새벽 4시 기상, 성경 읽기
새벽 6시 아침 식사
아침 7시~오후 12시 아르바이트
오후 1시~오후 5시 반 점심식사, 게이트볼
오후 6시 저녁 식사
오후 7시 일일드라마 '세 번째 결혼'
오후 8시 취침


며칠 전에 저녁놀을 보다가 불쑥 무안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35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인 데다 내 불량 무릎으로는 섣불리 결정하면 안 되었다. 게다가 지난번 무안에서 올라오다 뒷바퀴를 교체한 이후 원거리 주행이 조금 겁난다. 아쉬운 대로 무수히 찍었던 고모네 집 앞의 일출과 저녁놀 사진을 꺼내 본다.


고모네 집 앞에서 찍은 일출 사진


고모의 하루가 심플하게 흘렀듯 고모의 한 해도 단순했다.

"양파 농사는 딱 두 달만 일하면 돼야. 10월에 씨 뿌리고 5월에 수확할 때. 그때는 사람도 몇 명 써야 혀."

"고모, 제가 와서 아르바이트해도 돼요?"

"오메, 그때는 고돼부러서 같은 도시 사람은 병나야. 5월에 느그 친구덜 데리고 양파 몇 포대씩 주워 가. 아르바이트 말고야."


고모네 집에서 무안 도서관 가는 길.


고모께 여쭌 적이 있었다. 하루하루와 일 년이 너무 단순히 흘러가는 게 허무하진 않으시냐고.

"워메 뭐가 허무하대야. 기양 감사하제. 농사지을 수 있고잉, 따순 집에서 잘 수 있고야, 뭐시가 걱정이다냐."

어쩌면 내가 간간이 느꼈던 허무감, 덧없음은 삶에 대한 기대와 바람 때문이겠다.

내 상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풍족하게 살아본 적 없다는 열패감, 그 와중에 감사한 마음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

 

무안 내려간 초반에 고모가 달콤한 제안을 하셨다.

"글 쓰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르바이트하면서 살면 되지야."

나도 무안에서, 그게 아니라면 시골에서 고모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집과 땅을 얻고 농사짓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리라.

만약 무안에 정착한다면 두 고모를 부모님처럼 돌보는 일도 따를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의 아버지도 잘 돌봐드리지 못하는 주제에 어설픈 바람으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안산에 돌아온 뒤 2월 내내 마음의 몸살을 앓고 있다.

앞뒤 베란다로 보이는 건물들의 모습과 무안 들판이 겹쳐 보인다. 이 공간이 몹시 갑갑하게 느껴진다.

막막한 앞날이 불안하고 두렵다. 이 불안이 무안에서는 없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무안에서 고모처럼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건 도시녀의 일시적인 바람일 뿐인 것인가.


왼쪽: 양파밭. 오른쪽: 고모네 집에서 바다 가는 길에 만난 봄까치꽃


위층에 새로 이사 온 커플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새벽까지 들리는 날이 계속되어 항의를 할까 몇 번을 망설였는데, 그럴 때면 무안의 고요함이 그립다.

그리도 좋아하던 화정천으로 산책 가다가도 몇 번이나 건너야 하는 신호등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안 바다의 수평선과 출썩거림이 그립고, 미남이와 쨍이와 달리던 숨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고모와 마주하던 저녁 밥상의 감태무침과 간장게장 맛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늘 켜져 있던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이 순간들을 떠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안산 화정천

 


 

이전 21화 친정? 낯선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