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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Feb 27. 2024

친정? 낯선 곳?

무안 시골에서 한달살이 - 고모랑 동거하기


친정 동네로 간 건 나의 오산이었어.


회한에 젖은 듯한 순이 고모의 표정과 목소리가 지금도 선하다.

당신을 배신한 남편으로부터 정식 이혼도 못한 채 도망친 곳이 친정 언니가 있는 무안이었던 순이 고모. 그 선택이 가장 든든할 거라 믿었을 테다. 그런데 그것은 상상도 못 한 마음고생의 서막이었다.

고모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처지와 겹쳐졌다.


전 남편과 헤어졌을 때도 안산을 떠나지 못했듯, 지난가을 공부방을 접고 이사하기로 정한 곳이 오히려 그의 직장과 집에 더 가까워졌던 것이다.

헤어진 직후부터 나는 그와 연락이 닿기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들에게 '질척거리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가을 안산을 떠나지 못한 건 나의 오산이었다. 그걸 무안에서 올라오는 날 완전히 깨달았다.

 



순이 씨는 목포의 동생네서 몇 달 머무는 동안 무안에 땅을 얻어 소작을 하게 되었다. '압해도'를 매개로 목포와 무안이 연결되어 차로 삼십 분이면 닿았다. 해뜨기 전 트럭을 운전해 출근해 종일 농사를 지으면 몸이 천근이요 만근인 몸을 목포에 누였다. 몇 달 지난 뒤에는 출퇴근하기 어려우니 무안 맏언니네 앞에 집을 얻었다.


집이 너무 낡아 자다가 기척이 느껴져 눈을 뜨면 쥐들이 머리 근처를 왔다 갔다 했다. 기겁을 하여 밤잠을 설치고 아침이 되면 쥐를 막아볼 방도를 찾았지만 쥐라는 놈에게 흙벽 깨기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었다. 쥐들에게 밤과 밥을 뺏기는 날이 잦고 죽을지언정 이런 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한 어느 날이었다.


이 집이 쥐들이 득시글거리는 집이었다니.



막냇동생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내가 땅을 사겠으니 언니가 사는 날까지 집 짓고 농사지으며 사시오.


조립식 주택. 십칠 년째 순이 씨를 따숩게 품어주고 있다.


순이 씨는 지금의 조립식 주택을 짓고 이사하게 된 날, 창원에서 도망친 이후 처음으로 달게 잤다. 아니다. 자다가 이게 꿈인가 생신가 자신의 볼살을 꼬집어 보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면 살을 꼬집어 본다는 게 헛말이 아니구나 하면서.


농사일이 아무리 고돼도 고된 줄 몰랐다. 손바닥이 갈라져도 무릎이 말을 안 들어도 이런 것쯤이야 하였다. 그 와중에 아들과 딸은 각자 자기 자리를 잡으며 착실하게 살아갔다.


이젠 됐당께. 더 뭘 바란디야.


더 이상 바람이 없다고 여겼지만 삶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십 년 살아온 근거지에서 도망 나왔을 때가 예순이었으니, 순이 씨는 자신이 다 늙은 여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설레는 남정네가 보였다. 낯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쪽도 순이 씨에게 호감이 있는 듯했다. 홀아비라고 했으니 사귀어도 될지 몰랐다. 친구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순이 씨의 작은오빠 친구라고 하였다. 소문이 날까 무서워 순이 씨는 마음을 접었다. 안 그래도 이혼하고 왔다는 순이 씨를 마을 사람들이 온전히 품어줄지 어떨지도 모르는 터라 순이 씨는 행동에 각별히 조심, 또 조심했다.


순이 씨 눈에 들어온 남정네들이 하필이면 큰오빠 친구, 막내오빠 친구였다. 오랜 세월 어울려 살아온 그들은 친척이고 가족이어서, 연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마음을 줄 수도 없고, 그들의 마음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험담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수 차례 보았다. 소문은 실상보다 훨씬 더 지저분했다. 그런 일은 경상도나 전라도나 다르지 않게 일어났다.


무안 친정 동네에 들어와 싱글로 살아온 지 십칠 년이 가고 올해가 일흔일곱이 된 순이 씨.

순이 씨는 아쉬움이 크다. 예순이라는 호시절을 너무 쉽게 보내버린 것이.




남자 만나라잉. 니 안즉 젊어야.
내는 고것을 못혀 봐서 겁나게 아쉽당께. 여그에 와서 산 것은 큰 오산이었어야.


안산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린 날 저녁에 고모가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웃었다. 고모가 한 번 더 말씀했다.

"어디에서 만나요?"

"모임 같은 데 나가."

"저 만나는 친구들이 다 여자들이에요. 남사친 그런 것도 없어요."


오메. 재미읎네잉.
세월 다 보내고 후회허덜 말고 소개라도 받어야.



고모네 동네 양배추, 배추 밭들이 봄을 앞두고 갈아엎어지고 있다. 여기선 4천원이나 주고 산 양배추.ㅠ 매일 볶아먹고 쪄먹고 생으로 먹으며 너른 밭을 떠올린다.



순이 고모는 오후에 게이트볼장에 나갈 때마다 곱게 붉은 루주를 바르신다. 달뜬 표정으로. 귀여우시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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