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은 인생의 간이역일 줄 알았다. 목적지로 향하는 중에 지나쳐 갈 곳이지 머물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간소해도 괜찮았다. 게다가 고시원에 살다가 원룸이라니, 모든 것들이 훌륭했다. 그렇다고 내가, 간이역장이 될지는 몰랐다. 나는 15년차 원룸 생활자다. 며칠 전 계약을 1년 연장했으니 16년차를 확정했다. 그것도 한 방에서만.
2005년, 월 13만 원짜리 고시원이 시작이었다. 그곳은 상가 건물에 널빤지로 구획을 나누고, 구획마다 문을 달아 방이라고 이름 붙인 공간이었다. 아래층 당구장 소음과 옆방 손톱 깎는 소리가 다 들렸지만, 동생이나 룸메이트와 방을 공유하다가 독립된 내 공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들떴다.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순수한 나의 공간, 톨스토이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말한 최소 공간을 가짐으로써 나는 비로소 ‘사람’이었다.
사람의 생활은 아니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컴퓨터도 없는 고시원은 잠잘 수 있는 독서실이었다. 학생은 ‘공부하는 사람’이고, 나는 융통성 없는 학생이므로 합리적 공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고시원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누워 있어도 쉬고 싶어졌다. 화장실 간 사이 지갑 속 현금과 학생식당 식권을 두 번 도난당하고 나니 없던 정도 떨어졌다. 학교에 오래 머물며 귀가를 지연했다. 화장실 있는 방을 갖고 싶었으나 월세 2배에 관리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몇 년 후, 드디어 원룸을 가졌다. 시외를 벗어나니 월세는 비정상적으로 떨어졌다. 보증금 70만 원에 월 21만 원이었다. 소음에 민감해져 있었으므로 꼭대기 층 모서리 방만 봤다. 옆 방 하나와 아래 층 하나와만 면해 있는 방 중에서도 다른 건물과 마주하지 않는 남향 방을 점 찍었다. 부동산에서 소개 받은 날 밤, 한 번 더 찾아갔다. 잠겨 있지 않은 방에 들어가 3분여 간 깜깜한 고요를 확인 후 다음날 계약했다. 그날 같이 왔던 수험생 송은 수험생활이 지칠 때 간간히 와서 자고 가다가 지금은 30평대 자가 아파트에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원룸에서야 사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화장실 갈 때 문 잠그기는커녕 문을 열어 둔 채 용변을 봤고, 이어폰 없이 영상을 시청했고, 내 방에서 당당히 전화를 받았고, 내가 밥해서 내가 먹었다. 책상을 넓게 쓴 탓에 침대를 빼내고도 성인 남자 셋이 누우면 조금 징그러워지는 공간이 남았지만 더 이상 생활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이곳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문 것 같아 먼 곳으로 이사를 생각하고 하루 날 잡아 발품도 팔아 봤다. 부동산을 갈아타며 방 스무 개 가량을 봤지만 이곳의 저렴함과 조용함을 상쇄할 만한 방은 없었다. 계약을 갱신하며 도배/장판 비용을 깎아 월세를 17만 원까지 떨어트렸다. 무엇보다 역시, 이사가 귀찮았다. 귀찮음의 무덤, 내 방인 셈이었다.
세 번째 건물주 말에 의하면 내가 가장 오래된 세입자였다. 의외로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내게 1-2년 못 미치는 세입자도 있었다. 당신의 인생도 참, 그러나 궁금하지는 않았다. 세입자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 공실을 연기해야 했다. 외출 하려다가도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잠깐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였다. 마주해봐야 껄끄러웠다. 내가 이곳을 스쳐지나가듯 그들도 스쳐지나갈 것이므로 우리는 조용한 익명이면 충분히 우아했다.
나보다 먼저 원룸에 살았던 김에 의하면 원룸은 ‘개새끼들이 돈 벌려고 만든 깡통’이었다. 김의 집에 잠시 얹혀 있을 때가 있었다. 입주민은 자기 공간이라는 확신에 소리를 배설하지만 원룸 내벽은 생활소음을 감당할 만큼 두껍지 못했다. 소음 면에서 의외로 고시원보다 나을 게 없었다. 옆집에 술판이라도 벌어지면, 잠은 포기했다. 말이 통할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들 했다. 참다못해 정중히 부탁했을 때는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예의를 주입시킬 근육이 부족한 우리 탓이었다. 또 다른 옆집에서는 비주기적이지만 자주 교성이 넘어왔다. 장년의 택시 기사와 아내가 사는 집이었다. 아저씨의 강건함에 보내는 수컷으로서의 존중과 별개로 한낮에 울리는 중년 여성의 막걸리 같은 신음과 침대 삐걱거림은 찜찜했다.
“너 여기서 어떻게 살았냐?”
“이사하려고.”
그 경험 덕분에 나는 거르고 걸러 내 고요한 소행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룸사(史)는 소음사(史)다. 한 번은 자정쯤 옆 방 남자가 노래를 목청껏 불러댔다. 집주인에게 관리해달라고 연락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참다, 참다, 잠들지 못해 찾아갔다. 요청 받는 쪽에서는 모르겠지만, 요청하는 쪽에서는 마음속에서 수십 수백 번의 칼질 끝에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기(殺氣)를 숨기고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칼끝을 보이지 않으며 나름 정중히 요청했다. 옆집에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여자가 죄송하다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의외로 잘 풀릴지 알았지만, 남자의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1분…… 2분…… 3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옆집과 가까운 창을 열고 살의를 담아 악을 쓴 직후였다. 나 스스로도 놀랐다. 노랫소리는 단번에 그쳤다. 미친놈은 마동석만큼 강했다.
몇 년 후 진짜 미친놈이 나타났다. 자정이 넘은 시간, 어쩌면 새벽 두 시였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반복되었으니 최초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충격음이 들렸다. 거인이 둔기로 내 머리 쪽 벽면을 두들기는 듯했다. 복도에 인기척은 없었기에 아랫집을 의심했다. 소음원을 추적하러 나가자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맞춰 소리가 그쳤다. 다음에는 나왔다 들어간 척 문을 닫은 후 복도에 남아서 몇 십 분을 기다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소음원을 잡았다. 얼토당토않은 곳이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그 집 문을 두들길 엄두가 안 났다.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다.
건물주에게 민원이 쏟아진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 건물주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사태를 파악했다. 다른 집에서도 그 집을 용의자로 지목했다고 했다.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소리는 휘발되므로 애초에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이사 가기로 마음먹으니 속편했다.
어느 날 저녁 복도에 사람들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방 보러 올 때 치고는 사람이 많았고, 오래 끌었다. 뒤늦게 촉이 와서 나가보니 역시, 그 집 앞에 건물주와 입주민 절반쯤 모여 있었다. 기억 속에 마스크가 없는 것을 보면 코로나 팬데믹 전이었다. 용의자는 결백하다며 자기 방까지 공개했다. 확인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으나, 그 일 이후, 충격음이 뜸해졌다. 그가 나보다 먼저 계약이 만료되어 나간 후, 충격음도 사라졌다.
다시, 이곳이 아닐 이유가 없어졌다. 이후 줄곧 없었다. 아랫집 사람은 나보다 더 얌전히 생존하는 사람이었다. 이전 세입자는 통화 소리를 내곤 했지만, 지금 아랫집은 역대 가장 우아했다.
“아이고, 오래 돼서 벽지하고, 장판이……”
화장실 손잡이가 고장 난 다음 날, 건물주가 고쳐주러 온 날이었다. 그가 먼저 안쓰러워했다. 안쓰러움을 명분으로 월세를 깎을까 생각도 했지만 오른 물가를 생각하면 17만 원은 충분히 저렴했다. 그날 온 김에 새로 계약서를 썼다. 퇴실 시 청소비 1만 원만 추가했다.
“저 나가면 바꾸세요. 저는 괜찮아요.”
“언제까지 있으려고?”
“글쎄요.”
정말 괜찮을까? 이 방 안에 고인 낡음이 중첩된 응결핵, 내 인생, 진짜 괜찮을까? 혼자 남은 낡고 지저분한 방 안에 이질적으로 반들반들한 화장실 손잡이를 보고 있으니 시간은 본래 매끈하게 빛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낡아도 괜찮다는, 소박함을 가장한 체념에 중독되어 고독사에 수렴해 가는 시간을 살지 말았어야 했다. 십 몇 년 전 옆방 중년 부부의 교성이 떠올랐다.
나는 문득, 자기 소행성에 밀폐된 늙은 왕자였다. 내가 뱉은 숨을 내가 들이쉬며 날아오는 꽃씨는 장미든, 바오밥나무든 모두 뽑아 왔다. 모든 외부는 귀찮고, 이곳은 안전했다. 그런데 왜 이곳이 바오밥나무 숲 같을까? 바오밥나무에 목을 맨 어린왕자를 생각하며 방 모서리에 핀 검은 곰팡이를 물티슈로 닦았다. 두 번 닦았다. 계약서를 쓰는 날마다 치르는 연례행사다. 그럭저럭 닦인 자리에 락스를 1/2로 희석한 물을 분무하면 곰팡이는 그럭저럭 표백되었다. 그리고 흘러내린 락스 줄기가 하얗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