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 인생에 끼어든 존재감은 성가셨다. 최소 관계로 최대 혼자를 구축해온 내 인생을 물리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여야 하는 무력감의 이름, ‘큰아빠’였다. 삼촌도 아니고 작은아빠도 아니고 ‘큰(大)’아빠라니, 경범죄에 무기징역이라도 선고 받은 것 같았다. 동생 때문에 지는 연좌제는 부당했다. 무엇보다 쑥스러웠다. 나는 아빠인 적도 없었다.
조카들의 ‘처음’은 개만도 못했다. 본가에서 키우는 개들은 똥오줌을 가리고, 짓지도 않았고, 나를 알아보고 꼬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꼬물거리는 핏덩이는 아무 것도 못했다. 오직 울음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고장난 알람시계를 보며 인간이어서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워야 인간임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 소통 불가능한 생명체는, 내가 일방적으로 이해해줘야 하는 기생체는, 개보다 뜨거웠다. 조카를 안고 있을 때, 나는 유전자의 노예였다. 근연도 1/4에 냉랭한 논리가 근거 없이 논파 당했다. 품 안의 ‘네가 날 안 좋아하면 어쩌라고?’에 속수무책임을 예감했다.
조카들이 나를 알아보고 언어를 익히면서 현실은 파격적으로 변했다.
“큰아빠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
10살, 8살 된 여자 아이들에게 나는 ‘엄마’ 다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들을 향한 사돈 쪽 식구들의 애정물량공세를 압도할 자신 있다. 아이들이 큰아빠 노래를 부르는 덕분에 이미 사돈댁에서도 내 존재감이 작지 않다. 아이들 유치원 선생님들조차 내 실명을 안다. 설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실존하는 산타할아버지를 만날 것처럼 들떠서 동네방네 큰아빠를 자랑하고 다녔다.
아이들은 큰아빠에게서 남자 어른에게서 받고 싶은 만만하고 든든한 애정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동생은 경상도 옛날 남자 그 자체였고, 아이들과 있을 때 나는 이 마르고 단단한 문체가 벗겨졌다. 무려, 보드랍고 자상했다. 동생에게 없던 형을 동생은 어이없어 했다. 하긴 나도 아이들이 소환해 내는 내 안의 큰아빠가 낯설었다. 나는 아이들과 놀아주며 아이들의 금기(엄마, 아빠, 할머니)를 무질러줬다. 아이들은 나와 있을 때 모든 것이 가능했다. - 아빠 때려. 큰아빠 있으니까 괜찮아.
조카 바보는 아니다. 나는 결국 문체만큼의 인간이다. 큰조카는 스마트폰이 있지만, 내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그러하듯 먼저 전화 거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 아직 돈 개념이 희박하고, 용돈에 권리행사를 할 나이도 아니어서 초등 입학마다 제수씨에게 큰아빠 체면치레만 할 뿐, 직접 용돈을 주지도 않았다. 불규칙적으로 소소한 선물을 서너 번 챙겨줬지만 그곳의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는 이곳의 나와 무관했기에 모두 그냥 넘겼다. 이곳에서 최대치 혼자의 나는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가 아닌 것들이 귀찮다.
1년에 설에만 본가에 갔으므로 아이들과의 유대는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특히 작은 조카는 나를 인지한 이후 나와 함께 한 날의 총합이 열흘 조금 넘을 듯하다. 조카들은 이번 연휴에 며칠 전부터 언제 오느냐고 물어댔고, 당일에는 어디쯤 왔느냐며 빨리 오라고 세 번 보챘다. 본가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을 때, 아들 바보이신 엄마보다 먼저, 개보다 격하게 튀어나와 내게 안겼다. 책임 없는 사랑은 가성비가 좋았다.
아이들은 내 껌딱지였다. 내가 늦은 점심을 먹을 때 식탁에 나란히 앉아 이것 먹어보라, 저것 먹어보라 재잘거리고 자기가 먹었을 때 맛있었던 것을 내 밥에 올려주기도 했다. 식구들과 같이 먹을 때도 내 양옆은 조카들 차지였다.
“큰아빠가 그리 좋나?”
엄마 물음에,
“네.”
조카들은 천진했고,
“너희는 좋지만 내 아들은 골병난다.”
엄마는 농담에 진담을 섞으셨다. 우리 키울 때는 장난감 던져 주면 알아서 잘 놀았는데, 딸들은 계속 놀아달라고 보챈다고 힘들어 하셨고, 잘 놀아주는 나를 신기해 하셨다.
내 식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내 몫, 아니 나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명절 체계였다. 거실은 나머지 어른들의 공간, 안방은 나와 아이들의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 유치원에서 학습한 놀이를 준비해 두었다. 제대로 규칙을 숙지하지 못한 윷놀이, 돌 따먹기에 몰두한 바둑, 간소화된 그림 짝 맞추기, 인체구조가 뒤틀린 그림 그리기가 내게 재밌을 리 없었다. 그저 너희들이 좋아해서, 큰아빠도 좋았다. 아이들은 자기들 엉덩이로 ‘궁디팡팡’ 드럼을 쳐주길 원했고, 보물찾기 하자며 쪽지를 숨겨주기를 원했고, 목말을 태워주길 원했고, 안아 올려주기를 원했고, 침대에 내던져주길 원했고, 나는 응했다. 연애할 때도 낸 적 없던 유치하고 상냥한 효과음도 더했다.
피곤했다.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야 가볍게 받아냈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먹는 나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진심으로 부딪쳐 오는 무게는 버거웠으나 이것도 2-3년 남았을 뿐이라 생각하며 버텼다. 버티면, 내 일상에 결여되었던 성분들이 아등바등 충전되었다.
인간적 온기 충전의 대가로 ‘자기’는 방전되었다. 큰아빠인 동안 ‘나’는 억압되어 답답했다. 충전과 방전이 종합된 최적 효율 시간을 알 수 없으나 4일 연속은 아님이 분명했다. 동생네는 연휴 셋째 날 오전 처가에 가더니 저녁에 돌아와서 올해 4일을 부대꼈다. 그날 밤, 나는 큰조카가 동생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보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유아를 키우는 부모들이 왜 ‘뽀느님’을 칭송했는지 납득해버렸다. 뽀로로의 시간 동안 부모도 각자의 이름을 걸치고 쉬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겨울왕국> 엘사의 통치 정당성을 논할 수 없으니 이번 설에는 색종이 접기로 나름 대안을 마련해 갔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으로 꼼지락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트와 꽃 접기를 가르쳐 줬다. 조금 어려울지 알았지만, 큰조카는 종이접기는 어린이라면 다 할 줄 아는 거라며 솜씨를 뽐냈고, 작은조카는 큰조카에게 지기 싫어 최선을 다했다. 특히 작은조카는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겠다며 인원수대로 하트를 접어 각자의 이름까지 써 넣었다. 종이로 된 하트와 꽃의 시간에서 나와 큰아빠는 타협되었다.
타협의 절정은 병원 놀이였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두 의사들이 어떤 병이든 수술로 귀결되는 치료를 해줬다. 아이들에게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없었고, 내게는 누군가로부터 진지하게 돌봐지는 시간이 따뜻한 괄호 같았다. 괄호는 없어도 되지만, 있어서 본문의 의미를 더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X레이를 촬영하고, 환부를 가르고, 약을 발라줬다. 무지개약 사과맛이 적힌 처방전을 보노라면 느슨했던 1/4의 근연도는 다시 팽팽하게 차올라 두 아이들의 목말 쟁탈전에 기꺼이 내 어깨를 내줬다.
연휴 마지막 날, 동생이 집까지 태워줬다. 엄마가 따랐고, 조카들이 붙었다. 동생은 데려 온 개를 산책시키며 밖에서 대기했고, 엄마는 싸들고 온 반찬통으로 냉장고에서 테트리스 하셨고, 아이들은 내 조그마한 방을 놀라워했다.
“큰아빠 이런 데 산다. 너희가 커서 돈 벌면 큰아빠 집 사 줄 수 있겠나?”
엄마는 내 방을 늘 안쓰러워하셨다. 아이들은 보물찾기 하듯 내 책상을 뒤지다가 내게 고개를 획 돌리며 대답했다.
“네, 큰아빠 나중에 내가 집 사줄게요.”
한 순간 집 평수가 늘어났었다. 제 딸보다 개가 더 좋다는 동생 놈은 자기 집이 몇 평인지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멍청한 놈. 그리고 집 평수 늘리지 못하는 더 멍청한 나. 그래서 큰아빠다.
작은조카가 화장실 문손잡이를 고장 냈다. 평소에도 약간 이상하다 싶었었다. 내 손에 익은 손잡이라 나는 이상함을 이상하지 않게 손을 놀렸지만 8살짜리 키 높이에서 체중을 걸어 싣는 힘은 기어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문을 열긴 했지만, 문손잡이가 움직이지 않아 닫히지 않았다. 한파가 절정인 날이었다.
돌이켜 보면 천만다행이었다. 언젠가 고장 날 문손잡이였다. 내가 샤워 중일 때 고장 났다면 나는 꼼짝 없이 화장실에 갇혔을 것이다. 창으로 목을 빼 구조 요청하면 되겠지만, 온수를 몇 십 분 간 써가며 알몸으로 구조대원을 맞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영하 10도의 미래로부터 구원되었을 지도 몰랐다.
설을 세금처럼 지불하고, 나는 다시 평온한 혼자다. 소행성 안에 틀어박힌 늙은 왕자는 우주를 냉소하지만, 언제든지 너희와 연결될 가능성이 벼려진 냉소의 끝을 뭉그러뜨린다. 밤하늘의 별이자 사막의 우물이 나를 장미처럼 불러준다. 큰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