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따위 망해라)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질 때, 나는 왜 합류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이제 모두 용사되어 오, 돌아왔는고, 나는 고용주에게 사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아저씨가 되었다. 지구 따위 어떻게 되든가 말든가 내 주식만 올라라,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둘리나 제리가 아니라 고길동과 톰이 불쌍해 보이면 어른이 된 것이라고들 했다. 여기에 사회에 찌든 아저씨, 아줌마의 조건 하나를 추가할 수 있겠다. [플래시맨]을 비롯한 정의의 용사들을 직장인의 언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나서서 지구를 지키려고 할까? 어렸을 때야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우주 괴물과 싸우는 것은 당위였다. 멋있으니까! 지금은 지구방위대가 될 생각이 없다. 위험하니까! 정의롭지만 위험한 일에, 무엇보다도 돈도 안 되는 일에 굳이 내가 나서지 않는 것은 중년의 윤리다. 30대 때만 해도 이 윤리가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대수롭지 않다. 세상이 나를 포기했듯, 나도 세상을 포기했다.
지구방위대의 유지비를 따져보는 것은 중년의 호기심이다. 그들의 연봉은 얼마일까? 지구방위대는 휴일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면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이다. 지구에 청년이 10억 명쯤 있다고 할 때, 그 중 멋에 취하거나 사명감이 투철한 5명 정도의 무료 봉사자는 나올 것 같지만 능력 좋은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연봉은 높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급 월 1억에 위험수당, 승리 수당이 붙어 연봉 20억 이상 주면, 입사 경쟁률이 10:1쯤은 될까?
쓰고 보니 80년대적인 생각이다. 지금 플래시맨이 존재한다면, 두 당 최소 연 1,000억 원씩은 지급해도 남는 '장사'다. 그들은 10년 간 1조 원 조금 넘게 번 권투 선수 메이웨더의 위상을 능가할 것이다. 전투의 생중계는 곧 돈이다. 출연자가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죽을 때 지구도 끝장 나버릴 테니 시청자는 최상의 몰입감을 경험할 수 있다. 시청률은 전세계 동시 다발적으로 폭발해 별풍선만 해도 은하수를 이룰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인건비 연 2조 5천 억 원이면 대한민국 전체 병사 인건비보다 저렴하다. 지구방위대뿐만 아니라 무기와 전략을 연구하고, 로봇과 기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고급 인력과 시설 유지비도 필요하겠지만 우리나라 2021년 국방 예산 52조 8천 억 원보다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 레드 플래시는 코카콜라, 블루 플래시는 삼성, 그린 플래시는 스타벅스, 옐로우 플래시는 맥도날드, 핑크 플래시는 LG 로고가 가슴에 달린다. 무기에도 네이밍 판권을 팔아 애플 프리즘 슈터, 넷플릭스 롤링 발칸이 되고, 합체한 플래시킹의 가슴, 등, 팔뚝에도 전세계 온갖 기업들의 광고를 덕지덕지 붙는다. 윤리학자들은 광고가 플래시맨이 수행하는 공적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하겠지만, 이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할 방법은 없다.
그래도 한 가지 문제는 남는다. 전투 중에 발생하는 건물 붕괴와 시설물 파괴 복구비는 누가 보상해야 할까? 우주 괴물에게 청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괴물과 싸운 지구방위대에게 책임을 물으면 지구방위대는 전투에 제약이 발생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 개인? 개인이라면 사보험 시장이 활성화 될 것인가? 사고는 높은 확률로 심각하게 발생할 텐데 보험사는 감당할 수 있을까? - 이런 답 없는 생각을 하며 흐뭇해하고 있으니 나는 고장 난 중년이다.
내 생각들은 다분히 [어린왕자]스럽다. 나는 숫자의 언어에 익숙한 어른이다. 숫자로 설명되는 세상은 합리적이어서 명징하다. 지금 보면 플래시맨의 세상은 비합리투성이다. 수익이 나지 않는 활동을 하면서도 막대한 유지비를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UN과 세계 경찰이라는 미국은 지구 위기 상황에서 손놓고 있다. 악당은 괴물 한 기씩 보낼 것이 아니라 총력전을 펼치면 간단하게 지구방위대를 무찌를 수 있는데도 전략 변화를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구방위대도 악당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악당을 찾아가 그들의 본거지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적을 섬멸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들의 전략이라고는 공격 받은 이후 받아치는 것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고방식이 농경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농경 시대와 현대의 차이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플래시맨의 무기나 로봇이 진보하지 않는다. 프리즘 슈터와 롤링 발칸은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전대물 최초로 주연 로봇인 플래시킹이 패배하고 새로운 로봇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타이탄 보이와 그레이트 타이탄은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의천검이나 도룡도처럼 과거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다. 인류보다 앞선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R&D를 등한시 한 것이다. 운영비 탓이라면, 진작 광고를 통해서라도 자금을 모아야 했다.
아니, 지구를 지키는 일이므로 지구인들이 기부라도 해야 했다. 두당 1,000원 씩만 기부해도 7조 7천 억 원이다. 계산해 놓고 보니 이 금액을 매 월 세금으로 거둬들이면 연 92조 원의 세수가 확보되니 광고가 필요 없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광고가 나을까, 세금이 나을까. 그건 에라 모르겠다. 사실, 내 알 바 아니다.
내 관심사는 오직 돈인 것만 같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내가 방위하는 것은 나와 내 식구들뿐이다. 돈은 ‘우리 식구 방위대’의 목적이자 이 시대의 필살기다. 돈은 창조주다. 돈을 가지고서도 인격, 사랑, 행복을 못 사는 게 무능한 것이다. 고소득 계층의 혼인율은 높고, 이혼율은 낮다. 물론 돈이 없어도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돈은 모든 것을 수월하게 만든다. 그러니 다시, 그리고 영원히, 날아오르라 내 주식아,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돈에 매달린 동안 친구를 잃었다. 인생 친구 몇 명쯤은 남아 있지만, 새 친구 사귀기는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사막의 오아시스나 밤하늘의 별을 찾기에는 바쁘고 피곤하다. 친구의 범위가 좁아졌다. 어렸을 때 플래시맨 다섯 명을 하나의 단위로 이해한 것이나 내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플래시맨 멤버로 지구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우정의 범위가 동료를 넘어 지구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우리 식구 방위대’도 힘겨워 노심초사한다.
세계는 지켜야 할 대상에서 싸워야 할 주적으로 바뀌었다. 세계는 마법 같은 힘을 과시하는데 우리에겐 롤링 발칸도, 플래시킹도 없어 불리한 싸움이다. 힘들었고, 지겹고, 그렇게 버티다 늙어 죽을 것을 생각하니 인생이 영 시시해진다. 에라, 세계야, 아바다 케다브라(Avada Kedavra). 그냥 인류가 멸망하는 풍경을 보면서 맥주나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