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C다. 선택 말고,)
오늘도 하루가 시시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일 인생이 끝나도 상관없다는 정도의 소소한 우울도 이제는 지겹다. 수십 번 보다보니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하루는 똑같은 일상을 재생하되 점점 퇴색되어 간다. 죽었니, 살았니? 몰라, 썅. 거의 매일 시간(時間)에 시간(屍姦)당하는 기분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의 나는 스물다섯 살의 내가 꿈꾸던 인생을 일부 초월했다. 그때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라도 내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 예상되어 서른 살까지만 살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마흔을 넘겼고, 최저시급의 몇 곱을 받는 강사가 되었고, 글 쓰는 게 재미없어졌다. 좌절에 중독된 탓이 크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했다. 호그와트 교장 덤블도어는 인생은 재능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했다. 수긍이 가는 말들이지만 마흔을 넘겨보니 선택 대신 성격(Character)도 어울릴 것 같다. 인간은 성격만큼 선택하고, 어떤 선택을 하든 성격만큼 살아간다.
물론, 인생이 선택의 총합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사소한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크게 좌우하기도 하고, 결단이 인생을 극적으로 뒤집기도 한다. 우리는 ‘그래 결심했어!’와 ‘빠밤빰 빠밤빰 빠밤빰 빰빠바바밤’ 하는 BGM을 기억한다. 자신의 인생이라면 결코 알지 못할 ‘가지 않은 길’을 비교해 보기에 [TV인생극장]이 흥미로웠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후회든 호기심이든 무의미한 것들을 진지하게 상상해보는 것은 대체로 재밌다. 누구나 결단의 순간 한두 개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학생 중에는 A.연세대 중어중문과와 B.대구교육대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대구교육대를 선택한 학생도 있었고, 모의고사는 늘 1111을 찍지만 매번 수능을 망쳐 A.재수로 홍익대에 진학했다가 B.삼수로 서강대에 진학한 학생도 있었다. 이 학생들이 A를 선택했다면 인생의 형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내 경우 ‘만약’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암묵적으로 정직원이 보장된 금융권 인턴을 마다하고 월 72만 원짜리 한국어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23만 원인가 24만 원 하는 고시원에 살 때였다. 주2일 수업만 하면 되어서 ‘주유소에서 일하며 글쓰기’의 화이트칼라 버전이 실현된 것이므로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는 선택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몇 년 후 이 일을 아신 엄마는 ‘썩을 놈, 빌어먹을 글 쓰다가 인생 다 말아 먹는다.’고 허탈해 하셨다. 나는 아쉽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직장인이 되었다면, 가지 못한 길을 가져본 적 없으면서 실향민처럼 아쉬워했을 것이다. 쓰는 일에 진지했던 만큼 아쉬움은 기생충처럼 자의식을 좀먹었을 지도 몰랐다.
기승전-성격. 어차피 나는 ‘직장인’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억지로 반장을 떠맡던 학창시절을 제외하면 무리 생활을 원활히 한 적 없다. 학과, 동아리, 공익, 어학원, 학원 생활 모두 중심에 절반쯤만 발 담근 주변인을 자처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월요일 오후 3시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퇴근해봤자 화요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관계를 방치했다. 반장도 반 친구들을 대표한다기보다는 담임 선생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무리 속에서 나는 늘 혼자를 기다렸다. 안정적인 직장인이 되었다면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 덕분에 마흔 전후로 생물학적 인생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출퇴근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원이 되었든, 교수가 되었든, 조직에 속해야 하는 일이라면 형상만 조금씩 다를 뿐, 같은 무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어중간한 질료로 된 삶에 질렸을 것이다.
사람이 편해지는 유일한 공간은 강의실이었다. 글을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필자가 독자에게 필자의 생각을 전달하듯, 선생은 화자가 되어 청자에게 수업 내용을 전달했다.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된 학생들에게 내 말을 하는 일은 일종의 팬미팅이었다. 수업은 내게 노동이 아니라 놀이였고, 노는데 돈이 나왔으니 나는 운이 좋았다. 다만 수업은 훌륭한 항우울제 정도일 뿐, ‘의미’에 대한 기갈은 해소해주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성장해 나가는 학생들을 보면 제자리에서 나이만 먹어가는 나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말하자니 부끄럽지만 내가 작가로 성공하는 상상도 한다. 서점 베스트셀러 란에 내 책이 걸려 있을 때 자긍심이 치솟고, 누군가들인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고, 여기저기 강연을 나가 나를 마음껏 과시할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일상은 지금과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주5일 하루 6시간씩 머리가 싱싱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나는 지겹다. 그때는 더욱 사람이 필요 없을 테니 고립을 강화해 나갈 것이고, 인생은 더 시시해질 것이다.
내가 직장인이 되었다면, 내가 유명 소설가가 되었다면, 내 얼굴은 정말 달라져 있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뭐가 되었든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은 질리고 시시한 인생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나이 마흔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얼굴에 성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성격은 유전된다고 하니 그 말은 생물학적으로 타당하다. 그래도 인간인데, 조금 더 사람과 잘 지내는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할 수는 없었을까? 과잉된 자의식을 사랑을 통해 일부라도 중화시킬 수는 없었을까? 못생김은 못 바꿔도 인상은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지난날은 그렇게 후회하며, 오늘은 앞으로의 후회를 적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