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최고 예능이 [무한도전]이라면, 최강 예능은 [1박2일]이었다. 씨름판 최고를 꺾었던 최강 강호동은 시청율로 타예능을 압살했다. 무한도전은 리얼버라이어티의 문법을 정립하며 예능 프로그램이 거대 팬덤을 거느리는 기현상을 보여줬고, 1박2일은 복불복 주변에서 어떻게 웃길지 보이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의 파괴력을 자랑했다. 강호동과 아이들이 주는 웃음은 동그랑땡처럼 끝이 둥글고 속이 알차서 식구들이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일요일 저녁 밥상머리에 잘 어울렸다. 나는 무한도전 팬이지만, 회 당 평균 웃음량만 따지면 1박2일 쪽이 우세함을 부정 못 하겠다.
한동안 무한도전 아류라는 비판도 받았다. 리얼버라이어티가 태동한 시기에 표절과 장르의 유사성 구분이 애매한 때였다. 노홍철 입에서 시작된 구호 ‘1박~2일!’은 ‘무한~도전!’에서 온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1박2일은 여행 속에서 까나리로 대표되는 복불복 장인으로 거듭났다.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떤’ 복불복을 진행하는지가 중요했다. 이 주객전도가 여행의 자유를 극대화했다. 복불복이 만들어 내는 금기가 없으면 ‘나만 아니면 돼!’로 분출되는 자유의 오르가즘도 없었다.
자취하는 백수는 자유롭지 않다. 경제적 결핍은 곧 부자유다.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죽을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존재한다. 백수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인 존재 노동자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피로함에 짓눌린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고, 자도, 자도 개운하지 못할 만큼 존재 노동의 부자유는 가혹하다.
경제적 결핍이 해소된다고 해도 부자유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혼자’를 탈출하지 않는 한 자유는 없다. 돈 있는 백수 시절, 방구석에서 혼자 지내는 게 지겨워 국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루이틀 상쾌할 뿐, 처음 보는 여행지들이 점점 답답해졌다. 1박2일의 작법대로라면 ‘여행을 떠나요’나 ‘모아이’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할 텐데, 내 마음은 고요했다. 어딜 가나 혼자만 가득했다. 탁 트인 모든 곳이 답답했다.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를 부유하는 우주 비행사를 떠올렸다. 그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지독한 혼자에 갇혀 허우적댈 뿐이었다.
1박2일 촬영으로 은지원이 다녀갔다던 포항 어느 횟집에서 물회를 먹다가 발견한 것은, 자유란 ‘타자로부터’가 전제된 개념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싸력 53만의 프리더쯤은 한 주먹에 해치울 ‘초아싸이어인’이었다. 내 관심사가 협소한 탓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대화의 공통 소재가 드물었다. 나는 강제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고, 관심 없는 일에 귀기울이는 노역에 익숙해졌다.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금요일 퇴근길처럼 경쾌했다. 그런 경험이 누적되면서 나는 ‘혼밥’이 명명되기 전부터 파스타 정도는 혼자 먹으러 다녔다. 그렇게 10년 이상 혼자를 영위하고서야 인정했다. 나는 혼자라는 독방의 수감자였다. 금기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
나는 나 스스로 내게 금기를 부여했다. 중학교 때나 쓰던 스케줄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내가 설계한 기상 시간, 하루에 읽을 독서량, 글쓰기 분량 미션을 오늘의 내가 수행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한 안부 전화를 지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달력에 볼펜을 던져 체크된 날짜를 안부전화 날로 삼았다.
스케줄러의 핵심은 식사 복불복이었다. 주사위를 사서 식사 메뉴를 육지선다 형으로 제시했다. 호, 불호, 중립 메뉴를 2개씩 배치했다. 한 번은 4끼 연속 짜장면이 나온 적도 있었다. 점심에 짜장면, 저녁에 간짜장면, 다음날 아침에 짜장라면을 먹었다. 느끼해서 신 과일이 먹고 싶었지만, 후식 복불복에서는 식초 반 컵이 나왔다. 그 이후에 후식 복불복은 하지 않았다. 이날 점심에도 짜장면이 걸렸을 때, 쌍욕을 하며 책상을 내리쳤다. 단무지를 평소 3배쯤 먹었다. 저녁 볼북복에도 짜장면을 빼지 않았다. 다행히 우렁이 된장찌개가 나왔다. 그 순간 등골을 수직으로 뚫고 지나가는 물줄기는 쇼생크 탈출의 빗물이었다.
혼자만의 금기 놀이는 칸트나 되어야 지속할 수 있지, 나 같은 범인은 나 자신과 쉽게 타협했다. 복불복부터 흐지부지되었고, 두 주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스케줄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원점이었다. 결국 타자와 대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유는 신기루 같았다. 자유를 좇을수록 금기와의 마찰로 갈증만 더할 뿐 결코 닿을 수 없는 타는 목마름만 남았다. 인생이란 타자를 통한 고통과 재미의 맞교환 게임 같았다.
다소 허망한 소결을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승기야!” 덕분이었다. 최근 1박2일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마흔 살을 전후 한 강호동은 아무리 힘을 빼도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다. 멤버들은 장난처럼 강호동을 무서워했지만, 그 장난은 취중진담 같은 속마음을 담고 있었다. 누구도 강호동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지만, 강호동은 누구나 함부로 대할 수 있었다. 그는 프로그램 내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이승기는 예외였다. 이승기 앞에 선 강호동은 다른 멤버와 함께 있을 때와 달랐다. 보다 조심스럽고 관대했다. 강호동에게 이승기는 다른 멤버들보다 더 큰 금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일곱 살 차이 나는 막내에게 쩔쩔매는 큰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승기야!”밖에 없었다. 강호동은 이승기에게 “나 없이도 살 수 있어?”를 물으며 애정을 갈구했다. 자기 아이가 이승기처럼 자랐으면 좋겠다던 강호동의 바람을 알기에 그 질문은 농중진담 같았다. 이승기는 보고 싶긴 하겠지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고 강호동은 섭섭한 척 호탕하게 웃었다.
강호동의 웃음 속에는 ‘오구오구 내새끼’가 그득했다. 강호동에게 이승기는 금기가 아니었다. 타자라는 금기를 자유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타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 즉, 사랑이었다. 나는 타자를 사랑할 줄 몰라서 고립을 자처했던 것이고, 강호동은 이승기를 사랑함으로써 자유롭게 복종했던 것이고, 이것은 부모들의 보편문법이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결혼 전에 마음껏 자유를 누리라고들 했다. 결혼하면 자기 시간이 없어지고 남편이나 아빠로 살아야 하는 책임을 징징댔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승기야!’를 생각했다. 혼술의 자유, 게임의 자유, 여행의 자유는 나름의 가치를 지니겠지만 혼자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자유는 우주를 유영하는 것과 다름없다. 너희들은 그것을 겪기 전에 결혼해 버린 행운아들이다.
자식을 향한 내리 사랑은 생물학이 부여한 자유의 마약이다. 몇 몇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초아싸이언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약에 취해 있는 한, 세계가 압박해 오는 부자유를 견딜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식은 자신의 몸으로 유전자를 복불복으로 섞어 만들어낸 최고이자 최강의 금기다. 내게 남은, 14,601박 14,602일, 혹은 그 이상의 날들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나도 “승기야!” 같은 이름을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