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번아웃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번아웃 근처를 살아간다. 피로는 삶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지불하는 생존 세금이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모순에 속수무책이다. 휴일을 어영부영 보내다가 월요일(에)을 (처)맞는다. 회복이 덜 된 채로 한 주의 끝판왕과 싸워야 하는 게임은 반칙이지만, 내게 이 게임을 그만둘 권리가 없다.
잠도 오지 않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평범한 평일 오후였다. 가만히 있자니 지루했다. 야구 중계를 보면 시간이 더 느리게 흘렀다. 낯선 인물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는 보기도 전에 질렸다. 새로운 서사에 집중하는 것도 기 빨렸다. 특히 외국 영화는 자막 읽는 것부터 귀찮았다. 시간을 때우기에는 유튜브만 한 것도 없지만 광고를 스킵하거나 콘텐츠를 고르기 위해 일일이 터치해야 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이유는 몰랐다. 성룡의 [용형호제]를 다시 봤다. 아무리 우발적이라지만 30년이 넘은 외국 영화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의는 없었다. 역시, 이유는 몰랐다. 보는 내내 편안했고, 보고 나면 개운했다. 성룡 영화 시청이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순의 현현이었다. 그 다음 휴일에는 [쾌찬차]와 [프로젝트A]를 연이어서 봤다. 그 다음 휴일들도 [오복성], [폴리스스토리] 시리즈, [홍번구] 등으로 채워졌다.
언제, 무엇으로 성룡을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89년에 비디오를 샀으니 초등학생 시절임은 분명하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올 때, 성룡은 칭찬 보증수표였다. 성룡을 보고 나서 동생과 무술 합을 맞춰 놀았지만, 대체로 싸움으로 끝났던 기억은 있다. 그 외에 영화 내용이 명징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성룡을 봤다는 사실만 기억났다. 드문드문 명절 TV에서 재회할 때 모래로 된 예의를 주고받는 친척들보다 반가웠다. 리모컨을 쥔 친척 어른들과 채널 선택권이 없는 나는 성룡만큼은 공유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룡을 언제 만났는지 또한 기억나지 않는다. [폴리스 스토리 2014]였던 것 같기도 하고, [신주쿠 살인사건]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순서의 문제일 뿐, 둘 다 평범한 영화였지, 성룡이 아니었다. 성룡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내 한 시절의 일부가 끝나버린 것 같은 가벼운 아쉬움이 들었다. 성룡이 출연하거나 제작한 그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다.
성룡 영화의 장르는 성룡이다. ‘토마스’, ‘진가구’, ‘아강’, ‘재키’는 성룡의 이음동의어였다. 누군가는 캐릭터의 부재로 성룡을 평가절하할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내가 성룡에게 원한 것은 영화적 깊이나 다양성이 아니라 성룡이다. 성룡이야말로 그 자체로 예술이다. 예술이 인간의 진실을 추구한다면, 성룡은 몸의 서사에 진심을 다함으로써 극한으로 된 진실을 그려냈다.
다시 만난 성룡은 반가웠다. 의자와 탁자를 비롯, 주변 사물을 활용한 창의적인 격투신은 명불허전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나 ‘신데렐라는 어려서’처럼 동작만 짝짜꿍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수비 시의 시선처리까지 완벽했다. 몸과 몸이 빠르고 정교하게 부딪치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줄 뿐, 요즘처럼 카메라를 흔들어대며 생동감을 조작하지 않았다. 공원이나 인도를 질주하는 자동차 추격신도 오랜만이었다. 어디로 도망치든 빈 상자 더미에 부딪쳤고, 벤치와 노점은 부서졌고, 군중들은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 역시도 카메라가 아니라 몸으로 그려냈다.
성룡의 백미는 스턴트다. 성룡은 거의 모든 스턴트를 소화했다. [용형호제]에서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열기구 위에 착지했고, [프로젝트A]에서는 시계탑에서 떨어졌다. [폴리스 스토리1]에서는 우산 손잡이에 의지해 달리는 버스에 매달렸을 뿐만 아니라 5층 높이로 보이는 샹들리에를 타고 전구 장식을 부숴가며 떨어졌다. 영화를 볼 때는 감탄했지만, 메이킹 필름 속 NG 장면에서 성룡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감동했다. 무술의 합이 맞지 않아 정통으로 복부를 맞았고, 의자에서 잘못 떨어져 모서리에 허리를 찧는 것은 사소했다. 시계탑에서 떨어졌을 때는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성룡에게로 달려가는 스태프의 다급함에서 현장의 심각함이 전해졌다. 그러나 괜찮다. 당신은 성룡이다.
성룡을 보는 데는 주의력이나 긴장감은 필요 없다. 서사는 액션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막을 듬성듬성 읽어도 권선징악을 따라가는 데 무리 없다. 어차피 성룡이 이긴다. 또한 피를 튀기거나 여성과 끈적끈적해지지도 않고, 감정의 밀당 없이 우정으로 맺어진 동료들과 함께 하므로 관객은 감정의 이완과 수축을 반복할 여지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늘어질 뿐이다.
옛날 영화의 어쩔 수 없는 촌스러움이 감정의 이완을 보조한다. 추리닝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분식점에 가서는 하품을 쩍쩍 해대며 어묵 국물을 후루룩 댈 수 있는 만만함. 파스타를 먹으러 갈 때 은연중에 옥죄이는 수트와 구두 계열의 긴장감은 전무하다. 나는 본다는 자각 없이 멍하게 있을 뿐이다. 내 멍함 속에서 성룡은 쉬지 않고 치열하다. 촌스럽기에 더 빛나는 진심액션. 액션 충만하고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완성된다.
진심은 힘이 세다.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된 진심이 내게로 번져 온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성룡처럼 휙, 쿵, 으악, 슝, 이얍, 생동감이 그득그득 차오른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야말로 충전이다. 배터리는 충전할수록 수명이 낡아가지만, 마음은 충전할수록 수명이 늘어난다. 이쯤 되면 말할 수 있다. - 덤벼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