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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12. 2021

서태지 - 2. 꼰대의 탄생

“새끼가 건방지잖아. 누구 때문에 떴는데.”

갑질이 관행인 시대였다. 한 번도 견제 받은 적 없는 관행은 시대의 당위였다. 대중에게 자신을 알려야 하는 사람들은 언로(言路)를 쥔 사람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언로가 개방된 지금도 ‘기레기’들이 펜을 칼처럼 휘두르는데, 방송 3사밖에 없던 29년 전, 방송국PD의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그들은 힘을 모아 스물 한 살짜리 청년을 짓밟았다. 청년의 죄명 앞에는 ‘중졸 주제에’가 생략되어 있었다.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촉발된 90년대 가요의 추억 놀이에서 그는 소외되었다. 당시 인기를 누렸던 너도 나도 전설 대우를 하고 보니, 전설이 49,900원짜리 잭필드 신사 바지 3종 세트마냥 저렴해 보인다. 그가 언급될 때마다 보내는 찬사도 형식적인 수사 같다. 당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가수는 없었다. 내가 겪은 90년대 초중반은 ‘서태지와 아이들’과 기타 등등이었다.


가요사(史)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하나만 남긴다면 단연 서태지다. 서태지에 비벼볼 수 있는 건 BTS 정도겠지만 최고를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90년대 음반 판매량으로는 김건모, 신승훈이 앞서고, 팬들의 폭발력은 h.o.t와 비교해볼 법도 하지만 가요계 지존에 대한 합의는 문답무용. 대중문화사로 범위를 넓히면 이들의 격차는 도드라진다. 서태지 없이 90년대 이후 대중문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서태지는 주류를 전복한 혁명이었다.


‘문화 대통령’을 비롯해 ‘주류의 전복자’, ‘혁명가’는 과대포장 된 수사가 아니다. 컴백 조건으로 1997년에 제안 받은 금액만 100억 원(당시 시내버스 400원, 자장면 2500원)이었다. 그는 곧 문화였다. 한 가수가 문화가 되는 현상은 이효리나 GD가 근접할 뻔했으나 혁명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서태지는 새 시대의 시작점이었다. 수평적 외연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수직적 위계를 뒤엎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의 저항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보였다.


90년대에는 음반에 대한 권리를 음반 제작사가 가져갔다. 저작권 개념도 없었다. 가수들은 제작사가 시혜적으로 주는 돈을 받았고, 돈은 밤무대에서 벌었다. 가왕 조용필은 밤무대에 서기 싫어 명성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부를 누렸을 뿐, 자신의 명성으로 이 기형적 구조에 저항하지는 못했다. 마왕 신해철은 부조리를 직시하고 불만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이 부족한 건 아니다. 개인이 자신이 속한 체계에 저항하는 일은 어렵다. 초졸의 전태일이 그랬고, 고졸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노동자 처우 개선, 촛불혁명으로 그들의 정신은 계승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이룩된 새 시대에 그들은 없었다. 그것을, 스물한 살짜리 청년은 혼자 해낸 것이다. 그것도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아직 공고했던 90년대 초에.


서태지는 기여의 원칙을 따랐다. 기여의 원칙은 직관적 정의다. 아이들조차 자신이 기여한 만큼 몫을 분배 받는 것을 타당하게 여긴다. 음악으로 발생한 부는 음악을 만든 사람에게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데뷔 당시 현실은 주객이 전도되어 가수가 음반 제작사의 가마우지 노릇을 했다. 서태지는 데뷔 석 달 만에 소속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방송 출연도 자신이 결정했다. 방송국PD가 죽으라면 죽는 흉내라도 내야 했던 시대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었다. 소소하게는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문제로도 싸웠다. 저작권 문제로 음반 협회와도 싸웠고, 가사 심의 문제로 심의 기관과도 싸웠다. 이 싸움은 이익 다툼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여서 타협할 수 없었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생존권이 걸린 권력쟁투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는 노래를 만들지도 않았다. 애플이 ‘우리가 무엇을 만들든 소비자는 지갑을 열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기묘한 상품을 어처구니없는 가격에 출시하는 것처럼, 서태지는 <난 알아요> 이후, 2집에서는 힙합을 했고, 3집에서는 메탈을 했고, 4집에서는 갱스터랩을 했다. 어느 하나 주류 장르가 아니었다. 메탈은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재생하면 ‘피가 모자라’라고 들린다는 서태지 사탄설이 그럴 듯하게 유포될 정도로 대중에게 낯선 장르들이었고, 2021년까지도 메탈과 갱스터랩이 주류에 든 적 없었다. 그는 매번 자신이 구축한 주류 세계에 스스로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대중은 서태지에게 번번이 설득당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서태지는 대부분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구세대 문화 권력 전복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되며 형성된 사회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저항은 X세대의 상징 가치가 되었고,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징징대던 10들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며 주체적 자의식을 표출했다. 가요 산업의 권력 지형이 바뀐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물한 살, 그 나이의 나는 퍽 한심했다. 당시 공익 요원으로 구청 교통행정과에서 복무 중이었다. 교통행정과는 주차 단속 공익 요원이 많다보니 위계가 셌다. 나는 주거지 주차 전산 담당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과라는 이유로 아침 8시까지 나가서 단속 차량을 닦아야 했다. 아침 9시면 사무실에 횡대로 늘어서서 담당 주무관을 향해서 군인처럼 하나, 둘, 셋, 점오도 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공무원은 없었다. 나도 순응했다.


비겁한 청년은 나이를 먹어 더 비겁하고 단단한 중년이 되었다. 나이 마흔이면 그럭저럭 사회 체계가 몸에 절여지기 시작하면서 소소한 권력을 획득했고, 무언가 바뀌는 것은 귀찮았다. 내가 살아온 만큼 틀린 적 없으므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꼰대력(力)이 누적된다. 당장 이 글만 해도 서태지 지존주의(至尊主義)에 대해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나의 우상이 싸웠던 그, 구세대가 된 것이다.


옛 생각에 카페 문을 열고 지난 추억을 기억하면, 부끄러워질 것 같다. 이 밤이 깊이를 새겨가며 흐르고 흐르면 나는 더 꼰대가 되어갈 것을 안다. 그래서 꼰대라떼 한 잔 하며 서태지를 추억한다. - 하여간, 삶을 볼 때마다 내겐 가슴 떨리는 그 느낌이 아득하다. 새로운 것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에 청량감을 느끼는 것도 옛 말이다. 지금은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없다. 서태지 10집도 갈망하지 않는다.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지 않는다. 이런 내가 유감이지만 뭐 어쩌라고. 바로 여기가 단지 내게 유일한 장소이기에 새로움, 그런 것은 환상일 뿐이다. 보이는 길 밖에 세상은 없다. 그리고,


요즘 애들은 서태지를 인기 있었던 가수 중 하나로만 알다니, 참 건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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