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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r 19. 2021

롯데 자이언츠 - 6시 30분 내고향

(마! 우승 좀!!)

28년,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왜 하필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는가. 왜 나는 29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는 팀을 다시 응원하고 마는가.


야구는 몰입으로 압축되는 스포츠가 아니다. 야구 시청에는 방심의 미학이 있다. 공과 공 사이를 투수와 타자의 호흡이 조율되어야 해서 시합 흐름은 이대호만큼 느리다. 방망이와 공의 찰나를 한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은 역시 느리다. 방 청소하면서, 설거지 하면서, 인터넷하면서도 봐도 된다. 그러다 결정적 순간 느려서 더 간질간질한 순간이 온다.


퇴근 후, 혹은 주말 오후, 팬티 바람으로 치킨을 뜯으며 콜라나 맥주를 마시기며 시청하기 적합하다. 기운 없이 축 늘어져 보기 좋다. 스포츠를 극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야구야말로 기승전결 확실한 승부의 드라마다. 다큐멘터리 같은 투수전도 좋고, 액션 같은 난타전도 좋다. 내 최애가 잘하면 로맨스다.


물론, 이길 때 이야기일 뿐, 대부분의 경기는 응원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채워진다. 욕을 하다 보면 그날 저녁이나 주말이 병살타처럼 지워져 있다. 다시 안 봐야지 하지만, 다음 날 혹은 기적 같은 승리 뉴스가 뜨고 나면 또 그러고 있다. 인격 형성에 썩 좋은 습관은 아닌 듯하다.


부산에서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은 아니지만, 고통은 내 몫이다. 나도 인천, 서울, 광주, 대구에서 태어났다면 희망 고문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수원이나 창원에서 태어났다면 새 시대를 그리며 마음이 부풀었을 것이다. 요즘은 한화(7회)가 꼴찌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KBO 최다 꼴찌는 롯데(9회)다. 롯데는 20년 간 우승 못하면 프로 구단 존재 이유가 없다는 자아비판 이후에도 변한 게 없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초등학교 어느 시점에 문득, 롯데는 생활이었다. 나는 매일 밤 스포츠 뉴스를 통해 롯데의 승패를 챙겼다. 뉴스를 놓친 날에는 신문 가판대 앞을 얼쩡거리며 신문 헤드라인을 통해 승패를 확인했다. 애매한 표현으로 결과를 알 수 없는 날에는 엄마를 졸라 스포츠 신문을 사보기도 했다. 롯데가 진 날은 돈이 아까웠다.


롯데를 좋아해서 야구를 하게 되었는지, 야구를 하게 되어서 롯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하며 놀았다.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는데도 내 또래들은 한 집 건너 한 집에 낡은 글러브쯤은 있었고, 야구를 못하는 녀석은 무리에 끼려고 배트라도 갖고 있었고, 학교 테니스장에서 펜스 밖으로 테니스공을 달려 대서 아이가 있는 집집마다 테니스공 너덧 개씩은 갖고 있었다. 3명만 모여도 투수-포수-타자를 돌아가면서 놀았고, 일요일에는 다른 반이나 다른 동네와 야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


1992년, 내가 기억하는 롯데의 첫 우승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윤학길과 염종석의 완투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초딩들은 롯아일체의 거인이 되어 기고만장했다. 수학여행에서 타지역 초등학생들을 만나면 다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걸출한 신인 에이스가 생겼으니 몇 번은 더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92년 우승은 84년처럼 에이스의 어깨와 교환한 것이었다. 롯아일체는 해체되어 우리는 난장이의 기분을 한 중학생이 되었다.


1995년, 1999년에 준우승을 했다. 코리안 시리즈보다 99년 플레이오프의 기억이 강렬했다. 1승 3패를 3승 3패로 따라 붙어 만들어 낸 7차전,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은 고요하되 뜨겁고 산만했다. 카세트가 있는 친구들은 중계 상황을 교실에 전달했고, 그 친구들의 말에 따라 교실은 소리 없는 탄식과 함성이 뒤섞였다. 하굣길에 고등학생들을 비롯한 행인들은 전자제품 가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모든 TV는 야구 중계 중이었다. 만화처럼 역전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힘을 쥐어짠 나머지 코리안 시리즈에서는 1승 4패로 졌고, 2000년부터는 암흑의 전화번호 888-8577을 찍었다.


그 기간에 나는 대구에 와 있었다. 대구는 삶의 방식이 다른 동네였다. 사람들이 야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산은 롯데가 가을 야구에 진출하면 사직 야구장 인근 고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는 동네다. 사실이든 아니든 부산 사람이라면 납득했다. 그러나 대구는 아무도 삼성의 안부로 인사를 대신하지 않았다. 내가 살던 동네가 유별났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문화충격이었다. 충격은 곧 완화되었고, 나는 대구에 적응해갔다. 롯데 암흑기와 발맞춰 야구 자체에 관심을 잃었다.


내 마음에 다시 롯데 불을 붙인 것은 이대호였다. 롯데에 홈런 타자는 처음이었다. 92년 우승 시즌이나 95년, 99년 준우승 시즌에도 소총부대가 ‘열일’했다. 그런데 이대호는 2006년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까지 달성해버렸다. 롯데에 장종훈을 너머 이승엽에 견줄 타자가 있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이대호는 부산의 자부심이었다.


마! 니 딱 바나쓰!


좋은 것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탄하고 호들갑이지. 좋은 것들이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이유는 말 그대로 귀하기 때문이란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감탄하고 칭송하는 거란다. 별로 없어, 좋은 건. 그러니까 그런 걸 기대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기대하고 기대할수록 실망이 늘어나고, 고통스러워질 뿐인 거야.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이대호는 ‘좋은 것’이었지만 롯데는 ‘좋은 것’이 아니다. 타격 7관왕에 9경기 연속 홈런으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이대호와 연봉 7천만 원 때문에 연봉조정신청까지 간 것은 정 떨어지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이대호가 국내 복귀할 때, 팬들은 롯데 따위로 복귀하지 말라고들 했다. 에이스 장원준, 국대 포수 강민호를 더 많거나 동일한 연봉으로도 붙잡지 못한 것도 팀 내부가 어수선한 것을 증명했다.


롯데가 아니어도 더 좋은 팀이 많으므로 롯데가 ‘귀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시범 경기에 전설을 쓰는 봄데는 가을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롯데만 한 희망고문 기술자가 또 있을까. 떨어질 팀은 떨어진다는 속설을 LG보다 성실히 증명했다. LG 팬들이 유광잠바와 술병을 두고 한탄할 때마다 가소로웠다.


왜 다시 롯데기는. 연고지 프로팀은 가장 강력한 고향이니까. 롯데를 향한 끈질긴 중력은 마음의 혈연으로만 설명되기에 롯데가 내게 유발하는 수구초심은 마력(魔力)에 가깝다. 이제는 부산보다 대구에서 산 지 오래되었고, 부산에 대한 애착은 없는 반면 대구 시민 정체성이 고착화 되었지만 꼴찌를 한 번도 못한(?) 삼성에는 관심 없다. 라이온즈 파크를 지나다니면서 사직구장을 생각한다. 강민호가 삼성으로 이적해 갔을 때도 삼성에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강민호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도시화 이후 고향은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 가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고향을 지키지 않고, 누구나 실향민인 시대다. 그러나 ‘부산 갈매기’만큼은 어린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부산 사람을 강하게 연대한다. 한국인이 아리랑 전주를 들으면 마음이 뭉클해지듯이 나는 부산 갈매기 전주를 들으면 찡해진다. ‘지금은 그 어디서~’를 시작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같은 유년의 향수가 퍼진다. 그러니 세월이 가도 롯데일 수밖에. 당신의 NC, 두산, KT, LG, 키움, 기아, 삼성, SSG, 한화에도 코스모스 피어 있을 것이다. 이쁜이 곱분이 같은 이대호와 손아섭이 반겨주는.


고향 아재들


내 마지막 연애가 성공했다면, 내 아들이 1992년 내 나이가 되었을 세월이 흘러버렸다. 롯데가 헛방망이질하는 동안 내 인생도 썩 신통치 못한 셈이다. 우리에게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 돼호 은퇴 전에, 다시 한 번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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