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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ul 12. 2024

설거지가 시작되면 살이 빠진다

6월의 첫 설거지를 했다. 30일 밤 11시, 내일부터 달라지겠다는 믿지 못할 각오를 다지는, 아니 기원하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미룰 수 있었지만, 한 해의 허리를 기점으로 새해 복 많이 받는 기분을 다져 놓으면 후반기부터는 진짜 짜잔, 정상이 되고 싶었다. 나는 요즘 내 생에 가장 무절제한 날을 보냈다.


해야 할 것은 쉽게 미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냥 했다. 이부자리를 개지 않는 것은 일상적이었지만, 방바닥에 토마토 꽁다리가 굴러다니기는 처음이었다. 2015년부터 써오던 가계부도 5월부터는 쓰지 않았다. 미루다 보니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살이 쪘다. 노트북 바탕화면에 지워야 할 파일이 이틀 넘게 방치되곤 했다. 귀찮았다.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관성이 식습관에 포개지자 최악이었다. 5-6월 내 생에 가장 급격히 살이 쪘다. 현실을 직시하는 게 무서워 체중계에 오르지도 못했다. 꺼지지 않는 복부 팽만감으로 살이 찐 몸뚱이를 실감했다.


내 생에 이렇게 잘 먹은 것도 처음이었다. 1,000원이 대수롭지 않아지더니 한 끼 10,000원 안팎을 고민 없이 썼다. 아침에 눈 뜨면 그날 일정에 맞는 삼시세끼를 계획했다. 2022년 1-9월 월 평균 식비는 23만 원이 되지 않았고, 가계부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2024년 4월 식비는 548,900원이었다. 5, 6월은 가계부도 쓰지 않을 정도로 무절제해졌으니 이 달은 4월보다 더 썼을 것이다. 과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파프리카, 바나나, 토마토도 먹었다. 많이 먹었다. 소비가 소득을 좇아오는 형태가 비만이라면, 소득을 줄여야 하는 게 아닌가, 기만적 상상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 부류를 실천하고 있다.


생활 붕괴의 시작은 전방위적이었지만, 그 중심은 단연 스마트폰이다. 자고 일어났을 때, 쓰다가 생각이 멈출 때, 걷다가 횡단보도에 걸릴 때, 지하철 타고 있을 때, 자기 직전, 습관적으로 손이 갔다. 릴스는 엎친 데 덮친 재해였다. 스마트폰 중독과 식탐은 다르지 않았다. 금기를 어기는 기능이 매일 수십 번 실천되었기에 생활은 착실하게 망가졌다. 나는 당장의 단맛에 조건 반응하는 도파민의 개였다. 도파민에 길들여진 결과, 살이 쪘다. 내장 지방, 설거지 거리, 방바닥 먼지는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내장 지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장 지방 같은 공간 속에서 내장 지방으로 존재했다. 나는 그야말로 내장 지방 같은, 잉여였다.


애초에 먹는 걸 줄일 수 있고, 꾸준히 운동했다면 이 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의지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 의지의 주특기는 배신이다. 이 정도면 됐지 타협하던 것이, 별 수 없잖아 변명하다가, 아 몰라 몰라 방기하더니, 뭐 어쩌라고 당당해졌다. 의지가 나를 포기했듯, 나도 의지를 포기했다. 아침 일찍 동네 공터 여섯 바퀴 도는 것도 하루뿐이었다. 이런 의지로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도파민은 21세기 자연 재해고, 재해는 지나간 후 피해를 복구할 따름이었다. 지금은 다른 영역에서 금기를 지키는 최소한의 실천으로 기진한 의지에 미음을 먹여야 할 때였다.


다이어트는 음식과 운동간 칼로리 산수가 아니라 생활 습관의 ‘윤리’다. 살이 찌는 것은 자신에게 윤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비리다. 부패한 것도 자신이고, 부패를 감시하는 것도 자신이어서 비리는 쉽게 묵과된 것이다. 그래서 비만은 찌질하고 구리다. 선진국에서 비만은 하위 계층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하지만 나는 하위 계층이 아니다. 특히 이번 비만은 인스턴트 제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많이 먹고, 자주 먹고, 밤에 먹고, 달게 먹은 타당성이었다. ‘살 찔 자유’는 나를 향한 범죄고, 치킨과 피자는 향육체성의약품이다.


범죄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깨진 유리창을 복원하는 기분으로 설거지를 한 것이었다. 실제로 100칼로리는 어때서, 200칼로리는 어때서…… 가랑비에 옷 젖다 보니 경도 비만에 이르렀다. 싱크대 개수대는 내 가랑비의 또 다른 기록이자 형상화된 무절제였다. 그릇과 접시가 산더미처럼 쌓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기름기 있는 설거지 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쓴 그릇에 물을 담아 놨다가 대충 헹궈 다시 썼다. 헹굴 때, 내 손에 물 묻는 일 없도록 그릇 안의 물을 빙빙 돌렸다. 물때가 있다 싶으면 쌀뜨물로 헹구고, 최후에 가서야 손으로 한 번 문댔다. 냄비는 재첩국을 데웠다가 냉면 사리 삶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것들의 반복이 적당히 살균되지 않았느냐는 것이 위생 관념이었고, 수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직까지는 무탈했다. 물때처럼 켜를 두른 내장 지방은 무탈하지 않았다.


설거지는 10분 안팎 손 놀리면 될 간단한 일이었다. 막상 설거지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행주로 물기까지 닦아내어 뽀득반짝 스테인리스 표면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귀염뽀짝해지고 싶은 기분이 아주 조금 들었다. 이 아주 조금이 중요했다. 나는 방 곳곳에서, 생활 곳곳에서, 이 아주 조금을 모을 수 있었지만 모으지 않았다. 아주 조금의 순간은 많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화장실 세면대 머리칼은 치우고, 거울 물때는 지우고, 마른 빨래를 헹거에서 제때 거두고, 벗은 옷을 바닥에 두지 않고, 볼펜을 책상 가운데 두지 않는 등 물때 같은 습관들이 많다. 이 습관들을 설거지해 나가면 길 가다가 무의미하게 스마트폰 꺼내는 습관도 다스려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설거지의 관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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