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버린 고양이 이야기

by 하루오


‘나비’가 죽었다. 폭력적 공포에 압사당했다. 전해지는 말이 사실이라면 개 11마리에게 쫓기다 물어 뜯겼다. 나비가 죽을 때, 목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리 지은 개들은 더 이상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들판에 행정력은 없었다.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동물권 뒤에서 행정은 이 곳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삶과 죽음은 사람 부재 속에서 황망했다.


나비는 뒤질 쓰레기 봉지도 없는 공터에 살았다. 논밭이 매입되면서 사람들 입으로 번지던 ‘아파트가 들어선다’, ‘청과물 상설 총판이 들어선다’, ‘공장이 들어선다’들은 코로나 팬데믹 때 몰살당했다. 땅을 판 사람은 떠났고, 남은 사람들 중 몇몇은 자연사하며 마을에 빈집이 늘어났다. 실제로 이 동네는 2023년 11월 20개월 연속 인구 감소를 기록 중임을 뉴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14개월 후, 2025년 1월에는 65명 더 줄어 있었다.


거름으로 지력을 의지하던 논밭은 잡초도 제대로 품지 못하고 한 여름에도 맨땅을 드러내어, 멀리서 보면 초록은 무질서했다. 미리 닦아둔 도로만 지나치게 반듯했다. 신호등은 제대로 작동함으로써 잡을 것 없는 질서 속에서 풍경을 오작동시키는 듯했다. 허허벌판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폐양계장이 유일한 건축물이었다. 철창을 가려 놓은 천막은 비바람에 낡아 가며 구멍이 숭숭 뚫려 을씨년스러웠다. 나비는 폐양계장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유배되어 있었다.


나비는 엄마와 또 다른 캣맘들의 삼삼오오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엄마가 처음 본 나비는 비쩍 마른 고양이였다. 조금씩 물과 먹이를 주기 시작하다가 언젠가부터 매일 챙기기 시작했다. 양계장 근처에서 ‘나비야’라고 크게 외치면 근처에 있던 나비가 튀어 나왔다. 엄마만 나비라고 불렀으니 나비는 자신의 이름을 알아 듣기보다는 엄마의 기척을 먹이로 인식했을 것이다. 엄마는 비가 오나 한파가 오나 나비를 챙기려고 40여 분을 꼬박꼬박 걸었다.


엄마가 고양이 통조림을 사달라고 했을 때, 나는 박스 단위로 넉넉하게 사드렸다. 캣맘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보살핌은 엄마의 존재 형식이었다. 당신 이름을 버리고 내 엄마로만 살다가 돌볼 대상이 떠나버렸으니 내가 채워드리는 것은 내 의사와 무관한 마음의 삼투현상이었다. 1,000원도 안 하는 통조림 한 캔으로 엄마의 운동을 유인하는 것도 좋았다. 나비가 없을 때, 엄마는 이런저런 핑계로 조깅을 쉬셨다.


택배가 도착한 날, 나는 더 필요한 건 없느냐고 물었고, 엄마는 충분하다고, 전화기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흡족해 하셨다. ‘많은 양’은 냉장고를 쟁여 놓는 엄마의 또 다른 존재 형식이었다. 내가 보내드린 통조림이 엄마의 빼곡히 채워진 냉장고처럼 든든하길 바랐다. 나비 덕분에 엄마는 당신의 능숙한 형식으로 수행되었으니 엄마와 나비는 공생했다. 나도 흡족했으니, 멀리서 나도 공생했다.


설에 본가에 갔을 때 나비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엄마는 속상해 죽겠다고 물기 어린 마음을 풀어 놓으셨다. 나무라도 한 그루 있었다면 도망칠 수 있었을 거라고 몇 번을 반복하셨다. 잡풀뿐인 공터에 고양이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적이었을 것이다. 고양이의 순발력이면 개를 따돌릴 수 있었을 테지만, 오래된 개떼는 조직적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조깅 자체를 중단하셨다. 부를 수 없는 나비가 마음 아프고, 개떼가 무섭다고 하셨다. 그 길에 엄마가 없어서 개떼도 먹이를 잃었다. 엄마는 나비 자리에서 떨어진 먼 곳에 개 사료도 나눠주곤 하셨었다. 공멸이었다.


개떼를 탓할 수 없었다. 이사 간 농가, 폐업한 공장에서 개를 버렸다. 주인의 온기만 기억하는 개에게 주인이 아닌 인간은 분리불안을 자극했을 것이다. 불안의 동병상련, 조직화된 개떼는 버려진 것들의 증세인 셈이다. 그리움의 잔여로서의 욕구불만과 직면한 생존투쟁이 복합되어 개들의 야생성이 회복되어 갔다. 야생성은 자기 영역 안 쪽에 들어온 이방인을 강박적으로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비의 죄는 개가 아닌,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였다는 그뿐이었다. 세금 집행의 산수와 동물권의 외피를 두른 무관심은 정당했다.


인간의 작동 방식이기도 했다. 고양이와 개는 인간이 허락한 ‘반려’로서의 존재 형식이었고, 논밭도 인간이 허락한 자연의 존재 형식이었다. 인간의 동의 없이 인간의 영역에 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아 남으려면 인간의 쓸모에 부합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영역 가장자리와 아랫부분에서부터 쓸모는 제자리를 잃어간다. 지방은 비어가고 도시는 건물마다 공실이 창궐했다. 각자의 먹고사니즘이라는 외피를 두른 무관심 속에서 시대는 속수무책으로 흘러간다.


사람의 삶과 죽음도 사람의 부재 속에서 이뤄져 간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사람과 사람은 ‘비대면’으로 관계하는 데 익숙해졌다. 스마트폰 너머에 몰인격의 직업인조차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어 가는 중이고, 대면에 필요한 공간도 쓸모를 잃어 가는 중이다. 사람은 스마트폰 안에서 ‘좋아요’ 근처에 밀집하며 현실 공간의 심리적 인구밀도마저 떨어진다.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아서 각자에게로 유배된다. 유배지는 편리하고, 깔끔하다. 나비의 죽음도, 개떼의 굶주림도, 엄마의 상실감도 없다.


나비의 죽음은 내 예고편 같았다. 공실을 닮은 실업이 나를 쫓고 있다. 실업은 사회 구조가 만든 시대의 강박이다. 인공지능은 빠르고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숨통을 물어뜯고 있고, 더 정교하게 물어뜯을 것이다. 내 실업에 악의가 없으므로 인간권과 행정의 산수는 복잡해질 것이다. 일자리 학살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풍경은 잡초마저 뿌리 내릴 수 없는 공터다. 나비와 개떼가 죽은 자리에 언젠가 엄마가 묻힐 것이고, 나는 무덤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아랫세대는 도무지 모르겠다.


작은 방에는 미쳐 주지 못한 통조림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쌓여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비의 심리적 애도 기간이 끝나면 엄마는 다른 조깅 코스를 찾을 것이고, 거기서 또 다른 나비를 만날 것이다. 버려진 것들은 흔하디흔했다. 엄마의 존재 형식은 다시 당신을 복원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엄마의 쓸모이자,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쓸모였다. 다정함은 타자에 동의함으로써 자신도 동의되는 백전무패의 생존전략이다.


내게 엄마의 효용성은 ‘좋아요’였다. 엄마의 좋아요는 늘 나를 발견했다. 엄마가 있는 한 나는 유배될 수 없었다. 나비의 죽음은 다정하지 못한 시대의 증세다. 버려진 것들은 많았고, 나비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 흔한 것 하나를 돌보고, 존재를 불러내며, 쓸모를 만들어냈다. 엄마는 늘 그랬으므로 다음 나비를 만나면 또 불러줄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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