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마지막 날 퇴근길, 11.5km를 걸었다. 풍경을 살폈을 때는 2시간 25분, 시간을 의식했을 때는 1시간 55분, 기록을 의식했을 때는 1시간 44분쯤 걸렸다.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들어왔을 때, 내가 원시인의 후예임을 온몸으로 납득했다. 호모사피엔스 역사를 24시간으로 압축하면, 인류는 23시간 30분을 사냥하며 살았고, 이후 28분을 농경으로 살았다. 23시간 58분 동안 땀 흘려온 몸을 물려 받은 나는, 오랜만에 누리는 ‘쉬어도 되는 권리’에 한 점 부끄럼 없었다.
문명은 인간이 땀 흘리지 않도록 진보해왔다. 땀 흘리면 천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바람은 현실에서 이뤄진 적 없었다. 노예는 노동자로 대체되었고, 노동자는 기계로 대체되는 중이다. 땀은 더이상 생산성의 화폐가 아니다. 땀 흘릴 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은 실업자로 도태되었고, 땀 흘려도 되지 않는 인간은 취미 삼아 땀 흘렸다. 이제 피로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다. 남은 2분 중에서도 몇 십 초를 차지한 정보화사회는 인간이 적응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다. 땀 흘려 생존하던 몸은 디지털 피로 속에서 손가락 노동자로 전락했다. 흘린 땀이 없어서 ‘쉬어도 되는 권리’를 주장하기 민망하다. 문명은 인류의 땀이 아니라 진을 뺀다. 문명인은 영혼을 쥐어짜 밥 벌어 먹고 산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해서 개인이 문명의 주인은 아니다. 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새로운 자연이 되었다. 개인이 적응해야할 자연의 가이아는 시장이다. 시장은 노예제를 비롯한 신분제의 비효율성을 발견해 자유를 발명했고, 부의 증식을 위해 과학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에 날개를 달았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시장이 주는 편의에 중독되어 망각하고 있을 뿐, 개인은 시장의 식민지인이다.
시장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를 닮았다. 호모사피엔스는 남아프리카에서 기원해 걸어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호모사피엔스의 발자취에 타생물종의 멸종사가 뒤따랐다. 멸종할 때까지 착취하고 마는 습성은 시장으로 이어졌다. 착취 대상이 노예, 노동자를 거쳐 개인에 이른 것이다. 시장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도록 조종했다. 부가 무한해서 경쟁도 무한했다. 자유경쟁으로 구축된 자연에서 유일한 자유는 좀 더 비싼 내가 되기 위해 내가 나를 착취할 자유다. 경쟁 사회에서 자기 소외는 진부한 변명이다. 착취자도 나고, 피착취자도 나여서 착취는 노예제 때보다 가혹하다. 쉬어도 되는 권리를 스스로 박탈한다. 영혼에서 진을 짜내는 자기 소진이 일상화된다. 자기 착취에 죄책감은 없지만 휴식에 죄책감이 동반되는 자유 이데아는 무안하다.
‘나’가 사라진 자리를 숫자가 차지한다. 숫자는 인류사에 없던 참주다. 이전 주인들은 자신과 피지배인을 철저히 구분했지만, 숫자는 모든 인간을 동일한 기준으로 줄세운다. 세계를 숫자로 해석하며 스스로를 숫자로 칭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가 탄생한 것이다. 성적, 연봉, 아파트 평수가 개인의 가치로 측정되는 보편 상식이 자리 잡혔다. 큰 숫자에 큰 존재 가치가 따르는 자연선택을 부정할 밥 그릇 논리가 없다.
숫자는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이주했다. 상품의 가치에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매겨져서 상품의 가치가 매겨졌다. 시대 변화는 편의점에 가장 순도 높은 일상으로 응축되어 있다. 편의점은 숫자로 구축된 밝고,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이다. 편의점 내부에는 편의점 목소리밖에 없다. 상품을 팔아야 하므로 소비자의 욕구가 선반영되었다고 인식하기 쉽지만, 동네 할인 마트와 달리 편의점은 청결함과 화려한 디스플레이로 상품의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소비자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생산한다. 편의점에 들어서면 소비자는 욕구를 살(buy)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문명을 살(live) 수밖에 없다.
편의점 언어는 숫자다. 점원과 손님은 상품 가격과 지불 능력으로 소통한다. 소통의 순간, 모든 사람은 개별성을 잃는다. 오직 주체로서의 편의점과 객체로서의 점원, 소비자가 있을 뿐이다. 문명이란, 내가 익명의 숫자인 한 불편을 해결해주는 약속이다. 문명화 된 인간은 필요가 아니라 편의를 소비한다. ‘난 소중하니까’ 몇 백 원으로 ‘내가 불편’해지는 것을 거부한다. 소비 시민은 편의에 비용을 지불하므로 동네 할인 마트가 폐점한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서기 일쑤다. 편의를 누리다 보면, 숫자의 권능을 내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내가 누리는 편의에서 숫자를 걷어내면 나는 ‘할 수 없음’으로 귀결된다. 편의는 자기부전을 함의하는 것이다. 도보 20분 거리조차 사실상 멸종했다. 편의를 필요로 속이는 배달 음식, 전동 킥보드 문화나 그에 따른 환경 파괴 비용을 반영하지 않는 비열함은 시장의 주작용이다. ‘나’는 편안한 익명이자, 문명이 지구에 남긴 부작용이다.
사라진 이름조차 숫자로 충당하는 모양새다. 호모사피엔스가 대륙를 건너고 시대를 돌파하며 걸어온 끝에, 호모인플루엔티쿠스(Homo Influenticus)가 번성했다. 개인은 좋아요, 팔로우 숫자로 평가된다. 큰 숫자는 땀 흘리지 않는다. 희소성과 상대화 논리 속에서 스트레스로 진을 뺀다. 진 빠지고 남은 영혼은 허깨비가 아니라 인플루언서로 격상된다. 인플루언서의 영광은 숫자 식민지 시대의 상징이다. 무엇으로 유명한지, 주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명세를 독과점한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유명함은 자기효능을 함의한다. 유명인의 먹는 것, 노는 것 등의 신변잡기조차 숫자를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유명하지 않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태 중인 숫자세포다. 재래식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사회 최소 단위다. 시들한 숫자는 때처럼 밀릴 각오해야 한다. 나 역시도 스트레스로 영혼을 쥐어 짜 진을 빼 먹고 살지만 유명하지 않아서 교환비는 신통치 않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팔 수 있는 인격까지 팔아치워가며 하루하루 버틴다. 풍요의 시대, 밥 벌어 먹어서 다행인 아이러니가 짙어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세일을 경쟁적으로 내걸던 상가는 더 이상 할인할 교환가치가 없어서 임대로 밀려났다. 공실은 임차인을 고도처럼 기다린다. 실업자도 영혼을 팔 기회를 기다린다. 문명의 발전 속도는 가파르므로 모든 기다림은 빠르게 감가상각된다. 숫자 결핍은 숫자 집착을 강화한다. 숫자는 문명의 혈액이다.
숫자의 자아 침식은 최종 단계에 돌입했다. 파국은 예고된 미래다. 개인은 문명에 패배했다. 혹은 패배 중이다. 가치를 바닥까지 할인해도 쓸모를 증명할 수 없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펼쳐 놓을 문명 앞에서 개인은 숫자조차 되지 못한 채 확실하고 압도적으로 무능해질 것이다. 걸을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주는 불편하지 않은 일상에 밀폐되는 것이다.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으로 휘발성 도파민이나 핥으며 뒹굴뒹굴 무능을 위무할 뿐이다. ‘나’가 소중하지 않은 사회적 사실의 인지부조화로서 ‘나’에게 더 집착하겠지만, 손바닥 안 까만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칠 때, 호모인플루엔티쿠스가 되지 못한 잉여는,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다.
그래서 걸었다. 문명이 집적된 도시에서의 걸음은 의외로 효율적이다. 지하철역 오가는 시간 포함 45분 퇴근길을 1시간 45분으로 걸어냈을 때, 나는 꽤 유능한 인간이었다. 6량짜리 지하철 대비 22,150배, 소형차 대비 9배 에너지효율을 거뒀다. 문명은 편의를 명분으로 에너지의 찌꺼기를 자연에 전가하고, 몸의 가치를 할인해 온 것이다. 편의에 묻혀 있었을 뿐 몸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불편해지면, ‘할 수 있다’가 보인다.
시장이 분배하는 숫자는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없지만, 땀은 내 마음대로 흘릴 수 있다. 몸은 타인에게 과시되는 예쁜 껍데기가 아니라 땀 흘릴 기회다. 땀이야말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권리’를 누리기 위한 의무임을 잊고 있었다. 숫자 없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나는 나였다. 땀 흘려 한 주의 마침표를 찍은 밤, 소진된 ‘나’가 채워진다. 호모 사피엔스의 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