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후의 보루, 엄마

by 하루오

모든 엄마는 당신의 죄를 낳는다. 벌의 이름은 사랑이다. 혼자 사는 아들 집에 1시간 20분을 달려 와서 10분 남짓 머무른 뒤, 다시 1시간 20분을 달려 돌아가는 비효율을 기꺼이 감수하셨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서 길에서 버려지는 3시간 30분을 참지 못해, 추석 연휴에 강의를 핑계로 내 방에 틀어박혔지만, 당신은 내게 오는 길에 이미 설렜을 것이고, 돌아가는 길에는 흡족하셨을 것이다. 시장이 대적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 비합리성의 화신, 엄마다. 물론 세상 모든 엄마가 늘 헌신적이거나 선(善)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엄마에게서 발견되는 이 맹목적 돌봄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운이 좋았다. 강의 후 도서관에 들렀다 갈까 하다가 곧바로 귀가한 덕분에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은 내가 강의 중일까 봐 전화도 하지 않으셨다. 애초에 나를 못 만나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밑반찬, 명절 나물, 튀김, 육개장, 호박식혜, 사과, 떡을 냉장고에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정리한 뒤, 설날 이후 모아둔 반찬통을 수거해 가셨다. 그리고 내가 드리는 용돈에 미안해하셨다. 내게 요청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 앞에서도 늘 작아지셨다. 나는 받기만 해도 돌아오는 권력이 솔직히 달콤했다.


시장 사회에서 나를 지켜주는 건 엄마다. 시장 속에서 나는 미미한 ‘기능’일 뿐이다. 아직은 소소한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쓸모’를 증명하는 중이다. 민주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시장사회에선 대체 가능성을 의미했다. 결국 사회생활은 ‘대체당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에 수렴한다. 희소성이 없는 기능에게 존엄성은 없다. 그러나 엄마는, 적어도 내게, 맹목적 희소성으로 체험된다. 엄마가 다녀가신 날, 나는 시장 논리와 무관한 ‘남의 집 귀한 자식’이 되었다. 정갈한 반찬과 국으로 차려진 자취방의 한 끼가 존엄했다. 만약 한 인간의 가치가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남은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무게로 측정된다면, 내게는 엄마가 최대 주주다.


대주주는 가장 많은 배당금, 곧 사랑을 받는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경쟁이다. 열 달을 품고, 젖 먹여 키우고, 더 잦은 스킨십과 대화를 나눈 엄마가 이길 확률은 압도적이다. 그래서 욕설에서 엄마를 욕보이는 표현이 만국 공통이고, 어머니의 날이 아버지의 날보다 먼저 생겼거나 더 많기도 하다. 엄마보다 사랑받는 아빠가 있다면, 엄마가 무능했거나 아빠가 특출났던 예외 사례일 공산이 크다.


아버지는 아빠로 진화해야 했다. 아버지는 도태될 실재다. 근력 중심의 생산 체제에서 남아선호사상이 어쩌면 공리에 부합했을 수 있다. 남성의 기대 생산성이 더 높았고, 외부 침입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기능은 유용했다. 희소성은 가부장의 권위를 지지했다. 그러나 문명은 이미 이런 방식의 ‘아버지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했다. 생산 체제는 정보·문화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가정을 지키는 일은 국가의 치안 시스템이 담당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책임도 복지 제도를 통해 상당 부분 분산된다. 물론, 요즘은 아빠가 육아를 적극적으로 담당하거나, 돌봄을 잘하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그럼에도 가정에서 ‘부모’로서 존재감을 제대로 갖지 못한 아버지들은 은퇴 이후 군식구 취급받기 일쑤다. 아빠가 되려 해도, 아직은 엄마의 아성에 도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가부장사회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한 결과 만들어진 ‘모성 신화’라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 측면을 전혀 배제한 채 젠더 문제를 논하면 현실을 놓칠 수 있다. 대부분의 생물 종에서 수컷은 바깥을 지키고, 암컷은 무리 내부를 결속시켰다. 자기 자식을 확신할 수 없는 부성(父性)보다, 자기 자식을 확신할 수 있는 모성(母性)이 더 강력하게 진화한 건 유전적으로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SNS닉네임 OO맘은 흔하지만, OO팜은 드물다. SNS에 자식을 전시하는 쪽은 엄마가 더 많다. 예외 생물종이 있듯 인간에게서도 예외적 남성과 여성이 존재할 수 있을 뿐, 모성은 신화가 아니라 높은 확률의 실재다.


문제는 엄마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적 세계의 최고존엄 ‘엄마’는 공적 세계에선 ‘주부’나 ‘아줌마’로 폄하되기 쉽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나 하는 사람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가모장사회로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집안일의 가치는 여전히 평가절하된다. 식당에서 밥하는 사람은 셰프가 아니라 이모님이다. 가사도우미를 이모님이라 부르는 것도 존칭처럼 여겨진다. 이모님은 정서적 유대를 강조하는 별칭일지 몰라도 공적 명칭은 아니다. 이는 엄마의 기능성을 역설한다. 사적 존재감 때문에 공적 가치 획득에 실패한 것이다.


‘자아실현’은 엄마의 가치 복원을 지체시켰다. 자아실현의 관점에서 엄마는 열등한 꿈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됨에 따라 공공성을 획득하지 못한 엄마는 무능으로 전락한다. 새끼를 까는 동물성은 실현할 만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엄마들은 엄마의 가치를 주장하기 구차해진다. 엄마들이 말하는 당위는 변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애초에 자아실현 자체가 허구에 가까웠다. 실현해서 좋을 만한 가치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설사 특권적 가치를 획득했다고 해도 자아는 실현된 것이 아니다. 삶은 무엇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지속’의 문제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 자식 탄생이라는 수 많은 증언이 사실이라면 부모는 자아가 실현되는 보편 공리고, 아빠들에게 미안하지만, 부모의 왕은 엄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여성성이 종결되는 부정성으로 취급된다. 이때 박탈되는 여성성은 남성으로부터 대상화된 가치다. 성적 대상으로서 육체적 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능이 높은 생물종에게서 성관계는 번식 행위가 아니라 유희로 독립되므로 자연스러운 생물성이다. 그러나 대상화된 성만 미의 궁극으로 추앙되는 현상은 여성의 생물학적 가치를 할인할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제한한다. 엄마는 여성성의 다른 시작이다. 유전자는 번식과 양육에 행복감을 보상한다. 미혼은 이 가치를 계산하지 못한다. 나 또한 미혼이지만, 나이 들수록 물질 소비와 혼자만의 평온함으로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이 복리로 붙은 것이 체감된다. 조카들에게서 얻는 행복감과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을 종합해 보면 문명의 편의가 내게 주는 보상보다 유전자가 주는 보상이 더 큼이 산술된다.


엄마는 대체 불가능하기에 가장 희소한 자원이다. 실은 애초부터 엄마가 대체 가능했던 적은 없지만, 문명이 발전할수록 ‘엄마’라는 존재의 가치가 더욱 두드러진다. 과학기술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대체하며, 인간이 사회에서 잉여로 전락할 위험이 커질수록, 무조건적인 환대가 주는 의의가 커진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가장 근본적 형태가 ‘부성’보다 ‘모성’에서 더 빈번히 발견된다는 것은 많은 사례가 증언하고 있다. 아빠가 이런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진 엄마의 역할이 가장 확고하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엄마 됨이 평생 짊어질 죄인지, 아니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사랑의 다른 이름인지, 답은 이미 수많은 증언 속에 깃들어 있다. “인생 최고의 순간은 자식 탄생이었다”는 고백이 헛된 억지가 아니라면, 엄마가 되는 일은 결코 무능이나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실현의 가장 본질적이고 독보적인 방식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엄마 됨은 선택지도 못 되는 불가항력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기꺼이 열망하는 꿈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엄마라는 이름에 담긴 맹목적 돌봄을, 이제는 당당한 자아실현의 길로 인정하는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서는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 모두가 서로의 욕망을 타고 흐르는 세계에서, 엄마가 건네는 그 비합리적 사랑은 시장도, 이성도 감당 못 할 유일무이한 축복이다.

keyword
이전 08화죽어가는 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