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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다 : 몸의 폭발

몸 : 소리 없는 아우성

by 하루오

나는 아직도 코인 노래방에서 자위한다. 나이 들며 뜸해지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젠 거기밖에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 내가 아는 것을 내가 아는 방식으로 분출할 때, 나는 존재한다. 고로 소리친다. 가사도, 점수도 중요하지 않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굳이 언어로 붙들지 않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껏 내지른다. 나는 공간을 가득 채워 귀가 얼얼해진 부피다.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를, 내가 만진다.


강의실은 내 무대고, 수업은 내 쇼다. 수업이 많아질수록 마음의 결락이 커진다. 수업을 잘하면 하루오가 밀려났고, 수업을 못하면 강사가 오그라들었다. 쇼가 끝나고 나면, ‘내 말을 하고 싶다’가 강렬해진다. 어차피 생활사가 달라진 지인들에게는 할 말이 없고, 수업은 딱 떨어지는 내 생활사여서 하고 싶은 말이지만, 강사가 하루오에게, 혹은 하루오가 강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질감이 다르다. 어느 분인이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렸기 때문에 실제로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다. 그럼에도 참아지지 않는, 내용 없는 필연. ‘소리치다’는 내 몸에 가장 가까운 실재다. 몸이 곧 내용이다. 단언컨대 도스토예프스키도, 카뮈도 도달하지 못한 생생한 몸이다.


소리칠 때 몸은 전신을 동원한다. 손끝, 발끝에서부터 힘이 쭉쭉 끌려온다. 횡경막이 폐를 짜내 공기를 밀어올린다. 목이 조여 들면 성대는 마찰음으로 진동하고, 후두는 떨림을 감당하느라 치솟는다. 입이 벌어지고 혀는 무의식적으로 물러선다. 얼굴은 붉어지고 눈이 번들거린다. 소리친다는 건 단순히 성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 덩어리 몸이, 자기의 내부를 탈출하는 방식이다. 나는 나를 통째로 밀어낸다. 나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출한다. 배출하는데 채워진다. 채워져서, 비었던 것을 안다.


몸이 있지만 몸이 비어 있다는 역설은 결핍을 욕망으로 치환하며 신체 내부에 잠재한 몸의 이데아(理)를 호명한다. 몸의 이데아를 기(氣)가 밀어 올려 형상과 힘이 겹쳐질 때, 초인이 잠깐 실존한다. 빛과 어둠을 끌어안은 아브락사스, 끝없는 반복을 짊어진 시지프 사이를 아모르파티가 흐른다. 내 눈물도 흐른다. 잃어버린 첫 사랑도 흐른다. 산다는 게 그런 거다. 누구나 빈 손으로 와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산다.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때, 토할 듯 지르는 거다. 토사물에 지난 밤 마신 술과 옥수수 알갱이가 섞여 있다. 준비된 질문이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 비명이다. - R U Ready?


야~호. 나는 대관령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높이에서 소리 치고 싶은 충동은 몸에 새겨진 본능임을 안다. 대관절 몸 밖의 실재에 몸 안의 실재가 감응한 것이다. 소리칠 때, 실재와 실재 사이에 끼어 있는 윤곽으로서의 존재가 해방된다. 그러나 문명은 몸을 봉합하듯, ‘야호’를 금지했다. 문명에서 소리칠 일은 없었다. 먼 거리의 의사소통은 전파나 데이터가 대신한다. 굉음의 공장이나 공사장에서만 어쩔 수 없이 성량을 높인다. ‘소리치다’의 의미는 분노로 제한되며 일상에서 사장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경기장이나 공연장에 간다. 코인 노래방은 가장 저렴한 대관령이다.


“R U Ready!”가 성서인 시절이 있었다. Korn의 <blind>는 고요를 천천히 응축하다가 폭발시켰다. 폭발하는 고요라니, 말이 안 되는 개념이 체감됐다. 가사 뜻도 모른 채, 목이 쉴 때까지 갈았다. <말 달리자>, <또 다른 진심>, <청년폭도맹진가>를 거느리던 시절이었다. 함께 할 때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대체로 혼자 불렀다. 지금은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잔기침이 터져 부르지 못한다. 옛날 랩을 가장 빠르게 맞춰 놓고 다다다다 배설한다. 무게의 할부다. 1,000원이면 사우나로 땀 빼고 나온 듯 개운하다.


누군가와 함께 소리친 기억은 희미하다. 어렸을 때 사직 야구장, 학창시절 체육 대회 때 소리쳤을 것이다. 서태지 콘서트장에서는 구경만 했다. 그나마도 진행 요원 아르바이트 갔다가 주차장 관리를 맡았지만, 몰래 공연장에 들어가 구획 관리 그룹에 슬쩍 끼어든 덕분이었다. 콘서트장은 불을 피워 놓고 우가우가 맴도는 원시가 문명으로 재현된 듯했다. 확실히, 몸은 소리로 된 물질이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짐승적인 외침들이 하나로 뭉쳐진 광기의 진창은 살벌했다. 내가 몰랐던 내 몸과 너의 몸이, 하나로 뒤섞이는 집단 난교 속에서, 나는 다 외우고 있는 가사를 꾹 삼키며 얌전히 알바를 수행했다. 쏠쏠한 알바비를 벌었는데도,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주머니사정이 좋아졌을 때는 좋아함의 역동성이 떨어졌고, 대구에 살며 자이언츠를 응원했기에 라팍이 개장해도 남의 나라였다. 혼자 가기엔 면구스러웠다. 친구들은 야구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든 혼자 있고, 혼자 가고, 혼자 하길 좋아하지만, ‘소리치다’만은 혼자할 수 없었다. 탄핵 집회 때도, 응원봉 주변에서 입도 떼지 못했다. 구호도 외치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기 어색해 국밥만 먹고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불구의 기분이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릴 때, 집에 오길 잘했다, 굳이 속삭였다.


코인 노래방 바깥에서의 외침은 마음의 요실금이었다. 참다, 참다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지려버린 것이다. 한밤중 목청껏 노래 부르는 옆 집을 향해 나도 모르게 악을 썼고, 공터에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무리를 향해 샤우팅했다. -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을 필요 없이) 제발 좀 가라. 내 앞에서 제발, 제발 좀 없어져. - 고함 끝의 고요가 나를 겨눴다. 나는 고작 지린내 나는 인간이라는 혐의가 불편했다. 똥귀저기로 얼굴을 문지른 기분이었다. 피해자는 나였는데, 손발에 열감이 고이며 저릿해졌다. 물을 마셔도 찐득찐득해진 자의식이 씻기지 않았다.


사회인답게, 소리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나를 소리치게 만드는 일들을 피할 수 있는 권력에, 새삼 감사한다. 몸도 얌전하다. 여기저기 꼼꼼하게 망가져 가는 중일 텐데, 과묵하다. 몸이 소리치고 싶을 때는 몸이 끝장나려 할 때일 것이다. 아마 그 외침은 내 몫일 테고, 나는 그 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유지할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코인 노래방에 간다. - 힘차게 맹진하며 골로 가는 청춘은 끝없이 - R U 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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